아내와 서리풀공원을 걸었다.
코로나에 밀려 매번 집 근처 한강 주변만 걷다가 모처럼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대중교통도 오래간만에 이용해 보았다.
강남 성모병원 옆길로 공원에 들어 방배역 쪽으로 빠져나왔다.
아내에게 보조를 맞춰 쉬엄쉬엄 천천히 걸으니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예상했던 대로 산철쭉은 만개의 절정을 지나 끝물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미루다 일주일 정도 늦게 공원을 찾은 탓이다.
연초록의 잎들이 성긴 꽃잎 사이로 고개를 디밀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에 연연하기보단 눈과 마음을 열어 지금 주어진 것들을 즐기며 살 일이다.
계절은 우리의 선택적 기호와 상관없이 매 순간마다 어떤 절정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는가.
공원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름만으로 들끓는 번잡함이 떠오르는 강남 한 복판에서 만나는 뜻밖의 고요였다.
공원이 마련한 선물이고 우리에게 초록의 공원이 필요한 이유가 되겠다.
산책 중간쯤 몽마르트르라는 이국의 이름이 붙은 언덕에 앉아서 해찰을 부렸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가볍게 흩어졌다.
주인을 앞장선 작은 강아지가 킁킁거리며 지나가는가 하면, 뒤이어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새순이 돋은 소나무에서 노란 송홧가루가 부서지듯 살짝 흩날리기도 했다.
우리 곁을 가까이 지나가는 살찐 숫꿩과 마주치는 행운도 있었다.
나는 편도나무에게 말했노라.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그러자 편도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편도나무야, 나에게 신에 대해 이야기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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