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음식 중에 집에서 만들어 먹기 가장 어려운 음식이 무엇일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꼽는다.
심지어 영원히 밖에서 사 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면과 국물 그리고 몇 가지 고명을 얹은,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물냉면 한 그릇이 뭐가 그리 어려울까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재료의 이상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메밀과 전분의 배합비에 따라 식감과 맛이 달라지는 면을 제대로 만드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은 편이다. 배추김치, 무김치, 쇠고기와 돼지고기, 오이, 배, 삶은 달걀 등의 고명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문제는 국물이다.
평양냉면의 국물은 동치미국물, 돼지고기 국물, 꿩고기 국물, 닭고기 국물, 소고기 국물 등으로 다양하다. 우려낸 국물을 서로 섞어 쓰기도 한다. 어떤 재료로 육수를 우려내야 한다거나 다른 육수와 섞는 배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그러나 과정이야 어떠튼 최종 맛은 '담백하고 슴슴해야' 한다.
밍밍하지 않고 은근하게 깊은 맛이 나야 하는 것이다.
설혹 국물이 잘 만들어졌다고 해도 처음 맛보는 사람에게는 그 맛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걸레 빤 물에 만 국수' 같다는 과격한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평양냉면은 원래 양념장도 치치않기 때문에 달고 짠, 이른바 '단짠단짠'의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사람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無) 맛'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번 그 맛에 길들여지면 어느 음식보다도 중독성이 강한 음식이 된다.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절절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으젓한 사람들이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의 시 「국수」 중에서 -
백석은 평안북도에서 1912년에 태어난 시인이다.
위 시의 제목 「국수」는 지금의 국수가 아닌 냉면을 말한다.
시에 사용된 낯선 단어들은 '댕초가루=고춧가루, 삿방=삿자리를 깐 방, 아르궅=아랫목,
탄수=식초, 고담하다=꾸밈이 없고 담담하다'이다.
냉면은 원래 동장군의 기세가 등등한 한 겨울에 "더북한 삿방의 절절 끓는 아르궅"에서
얼음 동동 뜬 육수에 말아먹는 음식이다. 북한 지역은 쌀농사가 어렵다 보니 상대적으로 밥이나
떡보다는 국수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이용하는 가루에 따라 메밀국수,
농마(녹말)국수, 강냉이국수, 밀국수 등이 있고, 마는 방법에 따라 찬국수, 더운국수, 쟁반국수,
비빔국수, 회국수, 칼국수 등이 있다. 평양냉면은 주원료인 메밀이 잘 자라야 하므로
산이 많은 서북지역과 강원도 이북지역에서 특히 발달했다.
1800년 열한 살의 왕 순조는 숙수들이 모든 퇴근한 깊은 밤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 궁궐 밖에서
냉면을 시켜다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독살의 위험이 있는 국왕이 '테이크 아웃'의 파격을
행할 만큼 예전부터 냉면의 맛이 각별했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제빙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름에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고 전국화 되었다.
'냉면 마니아'라는 의미의 "냉면당(冷麵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냉면 배달부들의 파업 기사가
신문에 난 것도 그 시기이다.
남북 간에 인적교류가 있으면 평양에 있는 옥류관이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전문가들은 옥류관 냉면은 닭을 고아 만든 육수를 쓰기 때문에 기름진 편이라고 한다.
또 옥류관의 평양냉면은 탄력을 위해 농마 가루에 메밀가루를 80% 정도 섞어 남한의
냉면보다 더 검고 쫄깃하다고 한다.
그러나 옥류관이 평양냉면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한에도 곳곳에 평양냉면으로 이름난 식당들이 많이 있다.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요리하는 사람의 손에 따라 천차만별의 형태와 창조적인 맛이 가능하기에
어느 한 가지만이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없다.
서울시는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으로,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선정하여 미래유산이라
이름 붙였다.
그중에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서북면옥"이 있다. "서북면옥"은 1968년에 개업하여 5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평양냉면 전문점이다. 창업자의 출신지가 황해도 사리원이라 붙인 상호명이라고 한다.
식당의 규모는 작고 아담하다. 하지만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식당 명성이 자자하여 서북면옥 앞 구의사거리를 사람들은 아예 ‘서북면옥사거리’로 부를 정도이다.
서북면옥의 면은 직접 빻은 메밀 70%와 전분 30%로 만들어 부드럽게 끊어지고, 육수는
양지, 사태, 채끝으로 우려낸 고기 육수로 담백하다. 식당 한쪽 벽에 붙어 있는 ‘대미필담
(大味必淡: 정말 좋은 맛이란 반드시 담백한 것)’의 뜻에 충실한 맛이다.
평양냉면 외에 비빔냉면과 수육, 만두도 준수한 맛을 낸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는 식당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술은 팔지 않고 있다.
아내와 나는 어린이대공원을 산책한 후, 구의동 쪽으로 나가 이곳에서 냉면과 만두를 먹곤 한다.
화려하고 요란한 외래 대형음식점들이 넘쳐나는 시기에 소박하게 변두리 길가를 지키고 있는
이 작은 전통 식당이 오래 건재하기를 빈다.
(전화 02-457-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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