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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드디어' 방콕에 가다 8

by 장돌뱅이. 2022. 7. 8.


소나기는 피해 가라. 우기철의 방콕에선 특히 새겨둘 말이다. 빗줄기가 거세 우산도 우비도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퍼붓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잦아들 때까지 잠시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유일하고 현명한 방법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다행히 비 때문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딱 한 번 대책 없이 비와 마주 서게 된 경우를 제외하곤.


아이콘시암에서 식사를 할 적에 유리창으로 멀리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구름은 점차 하늘을 덮으며 다가왔다. 간간히 번개도 보였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겁만 주다가 그대로 지나가나 했는데 웬걸, 전철역에 도착하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철역의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철과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비가 그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하철에서 나오니 비가 멈추기는커녕 빗줄기가 더욱 거세져 있었다.

지하철 입구에서 호텔까지는 평소 같으면 결코 멀지 않을  불과 100여 미터의 거리
하지만 폭우 속에선 안드로메다로 가는 길만큼이나 멀어 보였다.

지하철에서 내린 다른 승객들도 우리처럼  입구에서 멈춰 섰다. 우산과 우비를 쓰고 걷던 행인들도 걷기를 포기하고  파라솔을 쓴 채로 버티던 노점상 아주머니도
우리가 서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조바심을 치는 대신 비에 무관심하다는 듯 핸드폰을 보거나 차분히 비 오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빗속으로 출발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아내와 나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래 봤자 100미터 아닌가! 지하철 입구 앞은 큰 사거리여서 신호등이 있었다. 초록빛으로 바뀌기를 기다려 출발을 했지만 열 발짝을 떼지 못해서 온몸이 젖고 말았다. 머리만 가린 작은 비닐봉지로는 애초부터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틈에 대형 파라솔로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3백 밧(만원 남짓)을 요구하는 사내도 있었다.


"어우! 당신 비에 젖으니까 섹시한데?"
발걸음을 재촉하며 아내에게 농담을 건넸다가 어이없다는 투의 지청구로 돌려받았다.
"난 원래부터 섹시했으니까 쓸데없는 말 말구 빨리 가기나 해!"
아내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투 현장을 지휘하는 소대장처럼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는 시가 있던가.
흠뻑 젖고 나자 서둘 것 없고 차라리 편해져서 우린 낄낄거렸다.
호텔에 들어서자 비는 차츰 잦아들었고 뒷날 아침 하늘은 시치미라도 뗀 듯 다시 맑아 있었다.

이 글을 쓰며 시를 찾아보았다.오규원의「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순례 1」였다.

강가에서 /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 얼마 쉰 뒤 /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던 우리.
여행은 그렇게 잠시 시간의 추녀 밑에 머무는 행위 아닐까.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강물'에 풍경과 기억을 흘려보내면서.
언젠가 그 자리에 다시 함께 머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 머묾과 바람으로 저물어 가는 생의 순간들을 위로하기도 하면서.

*배경음악 provided by 브금대통령 / Track : In the Rain - https://youtu.be/IEszJ91p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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