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못다한 사랑

by 장돌뱅이. 2023. 3. 18.

지난 수요일 저녁, 디즈니에서 방영하는 최민식 주연의 <<카지노>>를 보려고 하는데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이다. 목이 좀 아파서 자가검사를 해보니 두 줄이 나왔고 다행히 다른 가족들은 이상이 없다고 했다. 우리집으로 와서 혼자 격리생활을 하겠다고 하여 아내와 나는 부랴부랴 짐을 싸서 딸아이네로 피신을 떠나야 했다. 손자들은 환호를 했다.
9박 10일의 '코로나 난민'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침이면 큰 손자는 초등학교로 둘째는 어린이집으로 등교를 한다.
오후가 되면 각각 시간을 달리 하여 하교를 한다.
나의 임무는 아침에 손자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데려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노는 일이다. 
아내는 간만에 부엌일을 도맡아야 한다.
"집에 있으면 손에 물 안 묻히는 공주인데 여기 오면 무수리가 되네."

학교 교문이나 현관문 앞에서 손자를 기다리는 일, 연애 때 아내를 기다리는 설렘에 맞먹는다.
저만큼에서 나를 발견한 손자가 달려와 안기는 순간도 그렇다.   
첫째는 요즈음 장기에 재미를 붙여서 매일 한두 판을 두어야 한다. 도미노게임이나 우노게임도 해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두의 마블'이라는 보드게임도 해야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BTS의 노래를 함께 듣는다. 특히 'PERMISSION TO DANCE'를 좋아한다.

둘째는 새 학년이 되어 새로 편성된 '형아반'을 제법 자랑스럽게 말하더니 막상 아침이면 울면서 옛 교실로 가겠다고 떼를 쓰곤 한다. 기분이 좋아진 오후 귀갓길에는 내일 또 울 거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하 하 하" 웃겠다고 큰소리로 말한다. 

둘째는 기차놀이나 소방차 놀이를 좋아한다. 기차를 손에 쥐고 놀이방을 나와 거실로, 방으로, 화장실로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다녀야 한다. 소파는 높은 산과 절벽이 되고, 바닥은 평지나 사막이 되고, 흰 매트는 추운 북극이 된다. 소방차놀이는 집안의 빨간색은 다 불이다. 용감한 소방대원인 둘째는 나와 함께 불을 끄고 곰돌이 푸를 구해내야 한다.
똑같은 상황을 매일 같이 반복해도 아이들은 쉽게 질려하지 않는다.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Track : 아쭈꾸임 

그렇게 10일이 지났다. 마지막 날임을 알고 있는 첫째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등교를 했다.
집 청소를 하고 장난감들을 제자리에 정리해 주는 내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울렸다.
짧은 편지를 써서 첫째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손자보다 나의 아쉬움이 더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고 만나고 아무리 만나도 헤어질 때는 아쉬워
내일 또 만나자 약속은 하지만 언제나 그 말이 안 미더워'
송창식의 노래였던가?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헤어질 때의 느낌도 아내와 연애 시절의 그것이었다.


하얗게

하얗게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오래간만에 엄마를 만나 함께 하교를 한 둘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부재를 확인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딸아이가 영상을 보내왔다.
첫째는 편지를 읽다가 눈물을 반짝이며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방을 나갔다고 한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노프렌즈 도시락 만들기  (0) 2023.03.28
산수유 꽃이 피었다  (0) 2023.03.20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0) 2023.03.16
봄비가 온 뒤  (0) 2023.03.1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  (0) 2023.03.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