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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by 장돌뱅이. 2023. 3. 16.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는 과거 존재했던 호모 속(屬)의 여러 인류 종(種)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가 식물과 동물을 길들이고, 자연법칙을 밝히고, '이야기(신화, 허구, 상부구조?)'의 힘을 빌려 세계적 규모의 제국들을 건설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또 어떻게 전체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끼쳤고, 끝내는 자신 또한 그 피해자로 남게 되었는가(될 것인가)를 설명해 준다.

물론 그런 변화는 수만 년이란 장대한 시간에 걸쳐 너무 조금씩 느리게 느리게 일어났으므로 각 세대는 아무도 다른 방식으로 살았던 걸 자각하지 못할 만큼  그저 앞세대처럼 살아갔고 이따금 여기저기서 '개선'이 일어난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인류는 고대 수렵채집 생활을 거쳐 농업 사회라는 정착 생활에 들어갔다. 곡식을 채취하는 대신 재배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대신 가축화하여 키울 수 있었다. (원래 인간을 따라다니며 남은 음식을 먹던 야생 늑대는 대략 1만 5천 년 전에 인간 무리에 합류되어 개가 되었다.) 누구도 인간을 재배된 밀에 의존하도록 만들겠다고 작정한 사람도 없었고, 단지 몇 사람이 배를 채우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내린 작은 결정들이 쌓이고 쌓여 '농업혁명'이라는 문명의 대전환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인류를 '더 편안한 삶' 으로 이끌 것으로 기대했던 변화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또는 원치 않았던 쪽으로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정착으로 인한 비위생적인 밀집 생활은 환경오염과 전염병을 발생시켰다. 수렵채집 시절에는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인류가 독감, 천연두, 홍역 등 감염병에 시달리기 시작한 건 농업혁명으로 동물을 길들인 때부터였다.
대부분의 감염병이 닭, 소, 돼지 같은 가축에서 유래되었다.

식량 생산은 늘어났지만 기근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정착으로 인한 인구폭발로 먹일 입이 늘어난 것이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는 이동과 양육의 편의를 위해 4년에 한 번 정도 출산을 하던 여성들은 매년 출산을 해야 했다. 화석화된 골격을 보면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농부가 된 후손들보다 굶주림이나 영양실조를 덜 겪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키도 더 크고 건강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평균 수명은 30 -40세 정도였던 것 같지만 그건 주로 영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고, 위험한 시기를 무사히 넘긴 아이들은 50 - 60세까지는 족히 살았고, 80세까지 살기도 했다. 

게다가 노동의 강도도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커졌다. 고대 인류의 무릎과 팔꿈치, 허리와 목 등의 관절과 등뼈에 손상된 흔적이 이전에 비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원래 서서 생활하도록 태어난 인류에게  자세를 달리해야 하는 농업이 남긴 상처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건강하고 다양한 식생활, 비교적 짧은 노동 시간, 낮은 전염병 발생률 때문에, 농업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를  '원조풍요사회'라고 부른다.

농업혁명이 만든가장 획기적인 변화 중의 하나는 사유재산제도의 출현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몇 가지 도구와 옷가지를 소유하긴 하지만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공유지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동식물을 소유하지도 않았다.

'부유함'을 뜻하는 영어의 'rich'는 라틴어의 'rex' , 즉 국왕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경제적인 힘과 권력은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사유재산이라는 물적 토대는 통치계급을 등장시켰다. 직접 땅을 경작하지 않는 통치계급은 사람들을 위계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고 자연재해와 재난 같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명분으로 세금을 거두었다. 통치계급은 점차 왕, 관료, 군인, 성직자, 예술가, 사상가등으로 세분화 하였다.  이들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통치 이데올로기는 궁전, 요새, 기념비, 사원 건설을 부추겼고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바탕이 되었다. 
(80년대 '막걸리집 강좌'에서 주워들은 마르크스주의 식으로 표현하면 '생산수단을 비롯한 생산의 모든 관계인 하부구조가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 것이다.) 

또 다른 커다란 변화는 문자와 숫자의 발명에서 비롯되었다. 농업혁명 이후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도시 국가 유지를 위해 점점 증가하는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이 필요해졌다. 사람들에게 세금을 정확히 내도록 설득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문자와 숫자였다. 5천 년 전 수메르인들이 최초로 문자로 남긴 기록은 창조 신화나  전설, 시나 모험담이 아니라 누군가의 땅, 다른 사람의 재산, 축적된 빚 세금 지불액과 미납 세금을 표시한 단조로운 경제기록이었다. 

그리고 문서를 축적하기 시작한 사회들은 목록을 작성하고 처리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바로 신화와 관료제였다. 여기서 신화는 언어와 문자로 상부구조를 믿게 만드는 통치계급의 '허구'(이데올로기)쯤으로, 아니면 상부구조의 하나쯤으로 나는 이해했다. "식량이 더 필요해. 아이를 더 낳아. 천국이 코앞이야. 좀 더 힘을 내. 우린 한 배를 탄 운명이야"나 "저 위를 봐 구름 위에 신이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신이 벌줄 거야" 같은.

인류는 '더 편안한 삶'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고 믿었지만 사피엔스만의 거대한 제국 건설의 이면에는 공기 오염과 수질 오염, 음식물의 오염, 온난화, 사막화, 산림벌채, 종의 전멸 등의 자연파괴가 남게 되었다. 또 인종차별, 성차별, 빈부 격차 등의 사회적·경제적 갈등도 점점 격화되고 있다. 

피폐해져 가는 자연 위에 서 있는 문명의 마천루들이 위태롭게 보인다.
파괴된 환경은 경제제도도 파괴 시킬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세상의 토대인 하부구조조차도 어쩌면 그것을 절대적·근원적으로 받치고 있는 '더 깊은 하부구조'인 자연환경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Moby Dick』에서 고래를 쫓는 선장 에이헙은 일등 항해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모두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다. 목적만이 광적인 것이다."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가 보는 인류  역사의 진행은 에이헙 선장의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유발 하라리는  2020년 3월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코로나 이후의 세계(the world after coronavirus)"라는 글에서 인류가 '전 지구적 연대'를 주장했다. 인류가 그것을 선택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인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모든 미래의 전염병과 위기들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비극과 공포를 겪으면서도 사피엔스는 그다지 큰 자극을 받지 못한 것인지,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도 '광적인 목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달라지기는커녕 개인과 국가의 욕망과 이기주의는 오히려 더욱 커진 느낌이다.

이에 어떤 해답이 있을까? 쾌도난마의 답은 없어 보인다. 다만 오랫동안 당연시 되고 익숙해진 어떤 방식이나 관행에, 어쩔 수 없다거나 원래 그렇다는 설득에, 자연의 법칙인 척하는 인위적인 제도에, 결코 변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식'에 의문을 품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  
당장에 '답이 없어도 질문을 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아니 질문이 이미 답일 수 있다.


*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는 2011년 히브리어, 2014년 영문, 2015년 한국어판으로 출판되면서 세계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한  유발 하라리의『사피엔스』의 만화 버전인 것 같다. 총 4권으로 기획되어 현재까지 2권이 나왔다. 만화의 강점은 어려운 이야기를 시각까지 동원하여 쉽게 설명해 준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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