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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그런 날에도 무싯날에도

by 장돌뱅이. 2024. 5. 9.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년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부는 모양이다.

화려할 정도로 노란 밀밭은 물결치며 뒤척이고 있다.

짙푸름을 넘어 검푸른 하늘도 요동을 치는 것 같다.
붉은빛이 강렬한 황톳길은 세 갈래고 그중 가운데  길은 밀밭을 지나 하늘과 맞닿아 있다.
허공엔 검은 까마귀 떼가 점점이 날개를 펄럭이며 길게 밀려온다.

고흐가 죽음이 멀지 않은 시기에 그렸다는 선입감이 있어서 일까?
개개의 형상과 색은 발랄하거나 열정적인 것 같은데 전체적으론  뭔가 두렵고 공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당장은 화창하지만 잠시 후엔 거대한 태풍 같은 재난이 불어올 수도 있을 것 같은······

받지 못한 아내의 전화

대체적으로 좋은 일은 예정되어 있지만 나쁜 일은 정면에서 느닷없이 앞통수를 후려치며 온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을 듣고 유튜브로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를  보는 것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열무김치를 담근 아내가 목욕탕을 다녀오겠다고 나가고 뒤이어 나는 마을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 역시 자주 있는 일이었다.

도중에 깜빡 전화기를 집에 두고 왔다는 걸 알았지만 크게 낭패스럽지는 않았다.
긴급한 통화에서 자유로운 백수가 된 지도 벌써 오래되었으니까.
저녁 식사로 제주삼겹살과 청도미나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어떤 불길한 징후나 예감도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잠시 후 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여니 아내가 남긴 여러 통의 부재중  통화 기록이 떴다.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도 함께 와 있었다. 
"놀라진 말고. 내가 목욕탕에서 넘어져서 지금 00병원으로 가고 있어." 
억?! 벌떡 일어났다. 병원으로 달려가는 짧은 시간에 온갖 불길한 상상이 밀려왔다.
넘어져서? 아니면 쓰러져서? 병원에 어떻게 간 거지? 혼자 갔나? 아니면 119? 어디를 다친 거지?
왜 내가 하필 오늘  전화기를 들고가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과 후회가 몰려왔다.

아내는 눈에 가까운 이마를 다쳐 꿰매고 있었다.
의사는 상처가 깊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히 X레이 상에 뼈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세게 부딪혔으므로 일정 시간을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다칠 때의 충격 때문인지 아내는 사고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을 하지 못했다. 
피는 좀 났지만 정신을 차리니 멈춰서 상처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이 병원에 가라고 해서 혼자서 걸어왔다고 했다. 
미안했다. 같이 와주었어야 했는데 하필 그때 전화를 두고 가다니.
아프고 놀랐을 텐데 혼자 걸어왔을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고 눈물이 났다.
아내는 '전화기를 두고 간 거로 짐작했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지만 거듭 사과를 했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는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는 듯했다. 
예전 어머니가 병원에 있을 때 목욕탕에서 혼자 넘어져  식물인간된 여인을 본 적도 있다.
아내의 경우도 자칫했으면
더 큰 부상을 입을만한 사고였다.
눈을 다칠 수도 있었고 이를 부딪힐 수도 있었다.
그만한 것이 그래도 다행이라고 아내와 나는 손을 잡았다.

살다 보면 예고도 징후도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황당하고도 불운한 일들.
어쩔 수 없다. 
그런 날에도 무싯날에도 그저 '순정하고 푸른 사랑'의 첫날의 기억을 자주 불러오는 수밖에.
그리고 기도하는 수밖에.

널 지켜줄게
그 말 한마디 지키느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내 인생

세월이 흐르고서 나는 안다
젊은 날의 무모한 약속,
그 순정한 사랑의 언약이
날 지켜주었음을

나는 끝내
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깨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
이 치명상의 사랑밖에 없는데

어둠 속을 홀로 걸을 때나
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도
널 지켜줄게
붉은 목숨 바친
그 푸른 약속이
날 지켜주었음을

-  박노해,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 마음이 안정되면서 지금은 아내에게 진담도 농담도 건넬 여유가 생겼다.
"지금부터는  어디든 함께 가고 반드시  손을 꼭 잡고 다니라는 하늘의 뜻 아닐까? 그래야지!
근데 여탕 안은 여전히 문제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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