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공원에서 잠시 계단을 오르면 남산둘레길이 나온다.
남산의 중허리에서 남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7.5km의 길이다.
나무 그늘을 따라 평평한 길을 천천히 걷는 맛이 그만인 곳이다.
길 좌우의 나무들은 철마다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지금은 한창 물이 오르는 연두빛이 싱싱하다.
남산은 서울의 축복이다.
높이가 265미터로 낮아서 오르기 편하고 그럼에도 아름답고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도 있다.
남산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서울의 안산(案山)으로, 진산인 북한산의 책상(案)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남산에 국사당을 지어 목멱대왕이란 산신을 모시고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남산을 목멱산(木覓山)으로도 부르게 된 내력이다.
남산은 나무가 많다 하여 목밀산(木密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특히 소나무가 많아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애국가에도 나온다. 조선시대에 이미 정이오(鄭以吾,1354 - 1434)라는 사람은「남산8경」 중 하나로 '고갯마루 위의 키 큰 소나무 (嶺上長松)'를 꼽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남산에는 소나무가 70%를 차지했다고 하나 지금은 전체 산림의 20%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겸제 정선의 그림에는 남산은 물론 서울 장안이 온통 숲으로 가득하다.
화가의 회화적 해석이 들어갔겠지만 '진경산수화'이니 적어도 남산이 지금처럼 개발과 공해의 바다에 뜬 '외로운 섬'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남산은 주변과 생태의 고리가 단절되어 자연적으로는 식물들이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 닫힌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다 힘이 약한 종부터 죽어가 기형적 진화가 이루어진다. 예장공원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이름 붙여진 소나무도 남산 태생이 아니라 전북 고창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남산둘레길에서 반얀트리 호텔로 내려서 서울 성곽을 따라 장충체육관에 이르는 길은 아내와 내가 서울에서 좋아하는 산책길 중의 하나이다. 매번 성곽 안쪽, 그러니까 신라호텔 쪽으로 걸었는데 이번에는 바깥쪽, 다산동 쪽을 따라 걸었다.
다산동은 70년대의 모습이 남아 있는 동네였다. 대기업의 편의점이나 마트가 아닌 '동네슈퍼'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아마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이 자본의 침투를 막아주었던 모양이다.
성곽길 가까이에 카페 "의외의조합"이 있어 잠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깔끔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장충단(奬忠壇)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깡패 패거리들에게 시해당할 때 (을미사변) 순직한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고종이 광무 4년(1900년)에 세운 사당이다.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는 융희2년(1908년)부터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제사를 금지시켰다. 1920년부터는 벚꽃을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장충단공원'으로 불렀다. 1932년엔 장충단을 내려다보는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념하는 절, 박문사(博文寺)를 세우기도 했다.
장충단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고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담은 비석만 남아 있다.
앞면 글씨는 순종, 뒷면 비문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이 지은 것이다.
장충단공원의 새 이름은 서울남산공원 장충지구이다.
예장공원에서 다산성곽길까지는 두 번에 걸쳐서 걸었고 식사도 두번을 했다.
중구 신당동 약수역 근처 금돼지 식당은 미쉐린가이드에 몇 년째 올랐다고 한다.
식사시간대가 지났음에도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중국, 필리핀, 일본에서 온 젊은이들이 더 많았다.
웨이팅 기기에 등록을 하니 55번째라고 나왔다.
아무리 맛집이라도 기다리는 건 질색이지만 쉬어가기도 할겸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쯤 뒤에 자리가 났다.
뼈에 붙은 삼겹살과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고기의 질감과 맛이 괜찮았다.
향긋한 바질을 구워 고기와 싸먹는 것도 특이했다.
장충지구에서 나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이 있다.
태극당은 1945년 명동에서 개업하여 1973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대전의 성심당, 군산의 이성당 등 '당'으로 끝나는 빵집 이름은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시내로 목욕을 나온 날이면 부모님이 데리고 가곤 했던 무슨무슨'당'의 빵집들.
온갖 젊은 감성의 카페들이 곳곳에 포진한 시대에 레트로 감성의 "태극당"이 경쟁력이 있을까 ' 하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자리를 찾기 힘들만큼 사람들에 놀랐다.
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고 커피와 빵을 먹고 포장도 해왔다.
어릴 적 우리는 식빵을 '쇼빵'이라고 불렀다. 정확한 의미나 어원은 모르겠다.
태극당의 식빵에선 그 느낌이 났다. 다음에 그 근처를 지나면 다시 사 오기로 아내와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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