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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

by 장돌뱅이. 2025. 1. 7.

첫째 저하가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라떼'는 12월 크리스마스 전 방학에 들어가 2월 초에 개학을 하여 보름쯤 학교를 나가다 2월 하순에 다시 1주일 정도의 봄방학을 했다. 그리고 3월 초에 개학과 동시에 새 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손자저하는 좀 늦게 방학을 하는 대신 3월 초까지 중단 없이 긴 방학을 보내게 된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니 저하는 1년 동안 사물함에 보관 중이던 살림살이를 한 아름 들고 나왔다.
"한 학년 동안 수고했어."
나는 앞으로 나가 짐을 받아주었다.

방학 덕분에 모처럼 시간 여유가 있어 오래간만에 아내와 나, 저하 이렇게 셋이서 보드 게임을 했다. 손자저하는 연속으로 두 번을 졌다. 자연스럽게 져주려고 해도 안 될 때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게임에서 지면 눈물을 보이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는 담담한 표정과 태도를 보였다. 아마 여전히 마음이 쓰렸겠지만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내가 우리 손자가 의젓하다며 어깨를 토닥였다.

둘째 저하는 가끔씩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쓴다. 
그런데 저하만 알 수 있는 난해한 상형문자(그림?)다.
쓸 때마다 똑같은 걸 보면 저하 나름으론 어떤 규칙이나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슨 뜻이야?"
궁금해서 물어보면 "할아버지 사랑해요"라고 기다렸다는 듯이 립서비스를 한다.
"내 편지는?"
옆에 있던 아내가 샘이 난다는 억양으로 말을 하면 똑같이 쓰고선 "할머니 사랑해요" 하고 읽는다.
그리고 묻지도 않는 또 한 장을 쓰고 선 이번에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한다.
매번 글씨만이 아니라 테두리 선까지 똑같이 그린 종이는 감기나 충치약 처방전일 때도 있고 피자나 망고주스  주문을 받아 적은 식당 메모가 될 수도 있다.

어린 손자들은 매일매일 자라는 진행형이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꽃 피우면서.*
그래서 소란스러운 세상 너머의 희망을 꿈꾸게 한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 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 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 떼

- 나희덕 ,「어린것」-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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