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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늙는 맛, 늙은 맛

by 장돌뱅이. 2025. 6. 21.

<<I'll See You in my DREAMS>>.
직역을 하면 '꿈속에서 너를 보리라', 줄이면 '꿈속의 사랑' 정도겠는데 넷플릭스에서는 <<그리움과 함께 사는 법>>이란 서정적인 제목을 달았고 그게 영어 제목보다 더 영화의 내용에 부합되어 보였다.

그렇다고 추억을 먹고 산다는 식의 상투적인 노인의 그리움이 영화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노년의 고적한 삶을 잔잔하게 그러나 자못 유쾌하게 그려냈다.
노인의 영화였지만 노인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었다.

오래 전 비행기 사고로 남편을 잃고 캐롤은 반려견과 함께 단조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함께 TV를 보고 잠들고 일어나던 반려견마저 세상을 떠나자 삶은 더 무료해진다.

상실은 그리움의 원인이며 결과다.

"떠나보내는 건 힘들어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큰 구멍을 남기니까."
캐롤과 급속히 가까워지던 남자친구 빌이 말하지만, 그런 빌마저도 황망히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슬퍼하는 캐롤에게 그의 젊은 남자 친구가 말한다.
- 이해할만한 일이 아닌 걸요.

누구에게나 삶은 조금씩 어긋난다.
젊은 시절 가수였던 캐롤은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떠나 살게 되었다.
- 왜 노래를 그만 뒀나요?
- 기억 안 나요. 정신 차려보니 노래를 안 하고 있었죠.

늙으면서 누구나 그런 상실의 이력을 더해가기 마련이지만 상실의 횟수에 비례하여 맷집이 자라지는 않는다. 걸핏하면 집안에 출몰하여 캐롤을 놀라게 하는 들쥐처럼 상실은 매번 똑같은 크기의 구멍을 낼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빌이 가진 요트의 이름 'So what(그래서 뭐 어쩌라고)?'처럼  부조리한 삶에 한번쯤 투정어린 어깃장을 놓아보거나, 같이 늙어온 허물없는 친구들을 만나 카드게임이나 골프, 여행을 하고, 치기 어린 농담과 행동도 저지르면서 위로를 나누는 것뿐이다. 

- 사람들은 평생을 그러고 살아요. 그런 감정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다 결국 다들 알게 되죠. 평생을 기다리던 걸 얻게 돼요. 그게 뭔지 알아요?
- 행복요?
- 아니 죽음이요.

늙은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고
양파와 청양고추, 멸치를 넣고 끓인 보리된장찌개

매콤하고 들척지근한 맛이
우물처럼 깊었다

저 여자,
구시렁구시렁 늙어가더니

입술에 걸터앉은
말씀이 점점 깊어가네

- 안현심 「늙은 맛」 -

'몇 살이 되면 너무 애를 쓰지 않고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 수 있을까?'
영화 속 누군가 물었다.
글쎄, 살아있는 한 그런 나이는 없을 것이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다가오는 시간은 늘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저 노래를 부르거나 들어주는,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징그러운 쥐도 잡아주는 누군가를
만나고 보내며, 때로는 감격하고 때로는 실망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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