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지방에서 직장에 다닐 때 회사(를 빙자한) 일로 술자리가 많았다.
술자리는 늦은 귀가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하루는 얼큰하게 취해 귀가 택시를 기다리는데 옆에 꽃을 파는 노점상이 눈에 띄었다.
잦은 술자리가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한다발을 사서 집으로 들고 갔다.
처음에 아내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 (빈번하게) 늦을 때마다 면피용으로 꽃을 들고 귀가를 하자 점차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앞으로 꽃 사오지마. 취객들 상대여서인지 시들기 직전의 꽃만 파는 거 같더라구."
그리고 덧붙였다.
"아, 나도 밤 12시 넘어서가 아닌 시간에 꽃다발을 받고 싶다."
주말에 아내와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택배 도착 알림이 왔다.
무슨 택배?
알고 보니 딸아이가 보낸 프리지어 꽃다발이었다.
"남편한테 못 받은 제대로 된 꽃다발을 딸한테서 받네."
아내가 나의 약점을 찔렀다.
며칠 전 딸아이네 식탁에 놓인 프리지아 꽃을 보고 아내가 '와, 꽃도 예쁘고 향기도 좋다! 진짜 봄이 온 것 같다' 하고 감탄했던 걸 딸아이가 잊지 않고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한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나'는 '금성에서 온 아내'의 말을 해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딸아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평화로운 주말 분위기를 흔들어 놓은 꽃다발 테러······"
딸아이가 답장을 보내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빠가 술을 끊고 나자 한때 꽃이 풍성(?) 했던 우리 집은 꽃이 끊겼지. ㅋㅋ"
"택시정류장에서 꽃 파는 아줌마에게 VIP였던 우리 아빠."
연정에 겨운 산이 발치 아래 흐르는 처녀 강에게 오백 년도 더 된 활짝 꽃핀 이팝나무 한 그루를 뿌리째 뽑아, 옛쑤! 사랑허우 하며 꽃다발을 건네자, 처녀 강이 샐쭉 눈 흘기며 그 꽃다발 받아 안아 햇볕 쟁알대는 강 물낯에 흔들샌들 비추어 보는, 그런 사랑 한번쯤 해봤으면 좋겠네.
- 조재도,「통 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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