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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등나무꽃

by 장돌뱅이. 2025. 5. 6.

자주 걷는 산책길에 때맞춰 꽃들이 숨가쁘게 피었다 진다.
작년에도 여기에 이 꽃이 있었나? 이토록 여러 가지 꽃들이 살고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 길에 등나무가 서있는 건 알았지만 며칠 전 그 아래를 지나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향기에 고개를 들어 보고서야 마치 처음인 듯 '아! 등나무 꽃!'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야드레한 이파리만 골라 간지럼 태우던 오월 햇살이 등나무 넝쿨 그물에 그만 걸리고 말았습니다. 잘코사니, 등나무는 그 파닥거리는 햇살을 짐짓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친친 옭아맨 채 한나절이 다 가도록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날, 등나무는 또 한 송이의 연보랏빛 꽃타래를 비주룩이 내려뜨렸습니다.

- 윤효, 「등꽃」-

서울 변두리 어릴 적 우리 집에도 등나무가 있었다.

한길에서 곁가지처럼 뻗은 골목길 끝에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길은 오른쪽으로 꼬부라지고, 본채와 마당을 만나기 직전에 등나무가 제법 무성한 덩굴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봄이면 주렁주렁 탐스런 포도송이처럼 연보라색 꽃송이를 드리우고 그 아래를 지날 때마다 언뜻언뜻 몽환적인 향기를 뿌렸다.

지금 큰 손자저하의 나이 무렵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그 등나무 그늘을 벗어나기 전부터 등에 졌던 가방을 벗어 급하게 마루를 향해 던지고 놀러 나가다 어른들에게 걸려 야단을 맞곤 했다.
책과 공책이 찢어질 수 있고 필통 속 연필심이나 크레용이 다 부러지거나 곯는다는 것이었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속으로 '곯는다'는 게 뭘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마음 한쪽 변방에 있던 유년의 기억들을 문득문득 들춰보는 일은 언제나 나른한 행복이다.
안팎으로 '곯으며' 혹은 드라마 제목처럼 '폭싹 속으며' 건너온 세월 따위도 거기에 쉽게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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