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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슬픔도 힘이 된다

by 장돌뱅이. 2025. 5. 2.

오월 첫날 비가 왔다.
오다 말겠지 했는데 예보완 달리 거의 하루 종일 내렸다.
겨레붙이의 기일이 가까워 추모공원에 가보려던 날이었다.
비가 그치지 않아 뒷날로 미룰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녀왔다.

며칠 전 도서관에 앉아 함께 책을 읽던 중 문득 맞은편 아내를 바라보니 눈자위가 불그스레했다.
"왜?"
놀라서 아내가 읽던 책을 끌어다 보았다.
나태주의 시가 있었다.

너 내게서 떠나는 날
꽃이 피는 날이었으면 좋겠네
꽃 가운데서도 목련꽃
하늘과 땅 위에 새하얀 꽃등
밝히듯 피어오른 그런
봄날이었으면 좋겠네

너 내게서 떠나는 날
나 울지 않았으면 좋겠네
잘 갔다 오라고 다녀오라고
하루치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
가볍게 손 흔들듯 그렇게
떠나보냈으면 좋겠네

그렇다 해도 정말
마음속에서는 너도 모르게
꽃이 지고 있겠지
새하얀 목련꽃 흐득흐득
울음 삼키듯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려앉겠지.

-「목련꽃 낙화」-

나는 아내가 기일이 가까워오니 고인 생각에 그러는 것으로 짐작해 조용히 책을 돌려주었다.
추모공원에서도 아내는 눈시울을 붉혔다. 생전에 유독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비가 와서 그런지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난 커피 자체보다는 아내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는 자리면 더 좋고, 거기에 음악이 있으면 더 더 좋다.

커피를 마시다 아내가 말했다.
"지난번 도서관에서 시를 읽다가 울컥했던 거···그거 사실은···갑자기 당신과의 어떤 때를 상상하다가 그런 거야."
아!···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일 것이다. 아내는 전에도 종종 그랬다.
딸아이가 어렸을 적 먼 훗날의 일인 딸아이의 결혼을 이야기하다가 그것이 살가운 딸을 보내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닿으면 눈물을 짓곤 했다. 

*베트남 달랏에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던가? 아니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던가?
나는 그 말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하고 산다. 다만 진실로 슬퍼하는 사람의 착함만은 믿는다.
세상이 험악해진 것은 올바름을 향한 열정이나 분노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좀처럼 자신을 돌아보며 슬퍼하지 않는, 슬퍼할 줄 모르는 '단단한' 신념들이 많아서다.

우리의 현실은 마치 저마다 최후의 '성전'을 위해 마치 아마겟돈(Armageddon)으로 치닫는 듯 들끓는다. 하지만 '단단한 신념'들의 설레발 따위에 내 생각을 뒤로 물릴 생각은 없다.
대신 버팅김의 자리에서 옆으로 아래로 넓고 깊은 슬픔을 키우려 한다.
슬픔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자 가장 원초적인 힘이라고 믿는다.

*글 제목은 양귀자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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