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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정월 대보름

by 장돌뱅이. 2013. 2. 25.


정월 대보름.

어린 시절의 내겐 세뱃돈만 뺀다면 설날 보다는 단연 보름이 으뜸의 명절이었다.
무엇보다 아기자기하고 짜릿하기까지한 행사와 놀이가 풍성했다.
아침부터
'내 더위'를 팔기 위해 자못 긴장을 하며 이웃집 친구들과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저녁이면 어른들은 달집태우기를 했지만 우리들은 불깡통을 돌리는 (쥐)불놀이가 최고의 재미였다.
한껏 불을 지핀 깡통을 가끔씩 힘껏 하늘로 던져 올리곤 했다.

밤하늘에 날리는 불티들이 만드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 였다. 어른들은 불똥이 마른 짚가리에라도 떨어질까
호통을 치며 못하게 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신이
나서 위세를 떨며 몰려다녔다.

겨우내 날리던 던 연을 줄을 끊어 멀리 날려 보내는 것도 보름에 하는 일이었다.
한해의 액운을 함께 실어서 보내는 것이라 했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산에 놀러
갔다가 실과 함께 버려진 튼실한 방패연이 맘에 들어 주워 집으로 가져왔다가 
손사래와 호통을 치는 어른들의 모습에 기겁을 한 적도 있다.

보름날은 또 세 집 이상의 남의 집에서 나물과 밥을 얻어먹어야 했다.
그래야 복이 온다고 해서 우리 개구쟁이들은 미국 아이들이 할로윈에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것처럼 밥과 나물을 얻으러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집에서 어머니가 잘 차려 줄 음식을 무슨 청승인지 골방에 모여 얻어온 밥과 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왜 그랬는지 이웃동네 녀석들과 동네 언덕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돌멩이를 던지는 위험천만한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
보름날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언덕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때 돌에 맞은 흉터가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다.
나중에 책에서 보니 보름날의 투석전은 제법 오래된 풍습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때문에 경찰이 출동한 적도 많다고 한다. 

보름을 맞아 정식 오곡밥이 아닌 팥과 콩을 넣은 밥을 지었다.
나물도 아홉 가지가 아닌 두 가지만 준비했다.
아내는 가지나물을, 나는 무나물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나로서는 처음 만들어보는 것이라 또 다시 아내에게 이런저런 자문을 구해야 했다.
약식의 보름 밥상이었지만 귀밝이술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듣게 해달라고 코로나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며 달구경을 했다.
 

   牀前看月光 (침상 앞에 밝은 달빛)
  
疑是地上霜 (땅위에 내린 서리인가)
  
擧頭望山月 (고개 들어 산 위 달을 바라보고)
  
低頭思故鄕 (머리 숙여선 고향을 생각한다)
                  -
이태백의 시, “靜夜思 고요한 밤의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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