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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었을 때

by 장돌뱅이. 2013. 4. 12.


*위 사진 : 수술 전날 딸아이와 함께

아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헐렁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수술을 위한 여러 검사를  받고,
간호사와 의사의 반복되는 질문에 답하고, 몸속의 병보다 더 겁나는 수술 도중에
일어날 수 있는 무서운 가능성에 대한(발생확율은 거의 없다지만) 설명을 듣고
서명을 하며,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약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잠이든 아내의 발치에 앉아
나는 이불 밖으로 나온 작은 아내의 발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나와 함께 견뎌 온 한 세월이
아내의 갈라진 발 뒤꿈치에 스며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잠자리를 지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물 한방울도 삼키지 말라는 금식의처방을 따라야 하는 그녀의 갈증에
함께 동참하고 온힘을 모아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아쉬울 때만 매달리는
나의 이기적인 믿음도 이 순간만은 꾸짖지 말고 너그럽게 품어달라고 빌었다.

아침에 마침내 수술복으로 갈아 입자 아내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는 듯 했다.
나의 농담에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얼굴에 스며 있는 걱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무서워 떨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느님 야훼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중앙수술실 앞에서 마지막으로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언젠가 외웠던
성경 구절을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성호를 그으라고 말해 주었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실 문이 닫히고 나는 대기실로 와서 앉았다.
모니터에 아내의 이름이 켜지고 수술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긴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수술실에서 회복실로, 회복실에서 다시 병실 오는 시간은
세시간 반 정도였지만 그것은 내가 태어나 경험한 가장 긴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수술만 잘 끝나게 해달라고 빌었고
다음에는 무사히 회복실로 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회복실에서는 무사히 마취에서 깨어나 병실로 오게 해달라고 또 빌었다.
이제껏 하느님은 내게 세상에 대한 심판을 언제나 미루기만 하는
직무유기의 게으른 노인네였다.
그러나 그 세시간 동안은 그가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그냥 막무가내로 매달려도 되는 존재면 되었다.

마침내 아내는 병실로 나온다는 안내가 모니터와 핸드폰 문자를 통해 전해졌다.
나는 단숨에 달려갔다. 아내는 투명한 주사줄을 여기저기 매단 채로
이동침대에 누워서 나왔다. 힘에 겨운지 아직 눈도 뜨기 힘들어 했다.

"수고했어! 잘 이겨내서 우리 마누라 고마워!"

격렬했던 날이 가고 다시 저녁이 되었다.
여전히 물을 마실 수 없는 아내는 갈증을 호소하다 잠이 들었다.
나는 아내의 잠이 편안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었을 때
   그의 숨소리를 느끼기 위해
   아주 가까이 코를 대고 그의 숨소리를 빨아들인다
   오늘 하루, 그가 힘들어했을 모든 일들
   오늘 하루, 그가 괴로워 했던 모든 고통을
   들이마시고
   그가 숨을 들이마실때
   오늘 하루, 내가 그를 생각하면서 느꼈던 모든 것들
   나의 모든 것들, 나의 행복, 나의 기쁨을 그곳에 넣어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었을 때
   그가 깨어나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만
   조용히 다가가
   사방을 최대한 어둡게 하고 그가 깊게 깊게
   잠들 수 있게 하늘의 별들을 모두 먹어버린다
   그래서 그가 혹시 꿈길을 걸어갈 일이 생기면
   조용히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나씩 하나씩
   그 별들을 내어준다
   아주 작은 빛으로도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걸어갈 수 있게
   그가 놀라지 않게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었을 때
   그가 내일 아침에 혹은 새벽에 깨어났을 때
   아무런 흔적도 느낄 수 없을 만큼만
   그의 곁에서 지켜준다

   아,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 이화이의 시,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었을 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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