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어느날,
결혼을 생각하고 통장의 잔고를 보니 17만원...
직장 생활 만 일년의 결과가 그것이었다.
원래부터 많지도 않았던 월급이었지만
인출 금액의 대부분은 날마다 이어지던
술자리를 위해 쓰여졌을 것이다.
시인은 바람을 이야기 했지만
아마 학창 시절 이후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술'었던가 보다.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또 술을 마시다
"그만 마시고 신혼여행을 떠나라"는 친구들의 말에
등이 떠밀려 막차에 가까운 고속버스를 타고 떠난 곳이
유성이며 속리산이었다.
그나마도 사전에 준비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주말 데이트를 하 듯 떠나 이틀인가를 떠돌다 돌아왔다.
노란 단풍잎이 깔려 있던 속리산과 법주사,
논산의 관촉사의 머리가 큰 미륵불에,
장급 여관방에서 맥주 몇 병을 놓고
텔레비젼으로 대표팀 축구 경기를 보았던 기억이 있을 뿐...
17만원의 경제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자리에 누운 밤
왠지 서러움과 아내에게 미안함이 겹쳐
나는 소리 내어 울었고 아내는 그런 나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단칸의 셋방.
발랄한 여대생으로 혹은 중학교 교사로 부족할 것 없이 지냈을 아내는
장돌뱅이 아내가 되어 처음으로 경험하는 '빈처'의 생활을 묵묵히 견디어 주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사회생활을 핑계로
걸핏하면 밤 늦게 직장 동료들을 끌고와
아내에게 술과 안주를 보채거나
월급 나오기 일주일 전의 '보릿고개'에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빵잽이' 이력까지 쌓은 후배의
책방에서 사온 책이나 전집류를 슬그머니 내려 놓는 일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씨알의 소리" 란 잡지의 영인본 전집이었는데,
얼마 전 아내는 그 때를 회상한 바 있다.
이미 쪼갤 때로 쪼깨어 사용계획을 만들어놓은
나의 얄팍한 월급으로는 그 전집의 월부금을 갚아나갈
길이 막막했었다고...
물론 그때는 아무 말이 없었다.
후배 녀석의 책값도 떼어먹지 않았고.
10월28일.
우리의 결혼 기념일이다.
이곳 시간으로는 27일이기에
어제 저녁에 둘이서 자축을 하며 보냈다.
나는 와인 잔을 부딪히며
여전히 뻔뻔하게 어리광을 부렸다.
"24년 전 장돌뱅이 아내가 된 것을 축하해!"
아래 허접한 시는 오래 전 결혼 기념일을 앞두고
별다른 선물을 마련하지 못했던 내가 준비했던
낯 간지러운 이벤트의 흔적이다.
'대한민국 아줌마'로 거듭나 씩씩해졌다(?) 하더라도
내겐 여전히 예전의 모습인 아내도 그렇고
아직 튼튼한 사내가 되지 못한
나의 게으름과 뻔뻔함도 역시 여전할 뿐이어서
옛 먼지를 불어내며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공개적으로
다시 아내에게 바친다.
아내에게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 아직도 많음을
또 기억하면서...
들국화
하나둘
무성하던 나뭇잎들조차
퇴색한 모습으로 떨여져 쌓이고
무언가 아련한 외로움이
텅 빈 하늘 아래 피어오를 때
당신은 보랏빛으로 어우러져
이 외진 공장의 후미진 울타리
그늘 속에서도 가득 피어납니다
철없는 나는 잠시
황홀함으로 가슴 설레지만
당신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숱한 시간 속에서 계절을 맞고 보내며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의 만남을 준비해왔을 겁니다.
기다림에 목마른 무더운 여름이거나
희망의 문이 굳게 잠긴 차디찬 겨울이거나
그리하여 많은 것들이 스러지는
이 가을의 한복판에서
당신은 눈부시게 부활하며
아직 아무 것도 거둬들이지 못하는
허허로운 나의 삶을 따사롭게 감싸줍니다
먼 고향의 푸른 하늘을 향한 그리움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당신은 이미 이곳에 마련한 것입니다
이제 바람 부는 벌판에 서서
작업복 주머니 속을 뒤집어
케케묵은 옛 먼지들을 훌훌 날려 보내고
나도 튼튼한 사내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혼 6주년을 위하여
1990.10.27
(2008. 10)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었을 때 (0) | 2013.04.12 |
---|---|
내 숨 같은...... (4) | 2013.04.11 |
귀국길, LA 공항에서 (0) | 2013.04.10 |
내가 살던 고향은 (0) | 2013.04.03 |
아내의 힘찬 달리기 (0) | 2013.03.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