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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개밥바라기별』그리고 황석영...

by 장돌뱅이. 2013. 6. 26.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비어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황석영이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 을 그린 성장소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의 "문학연대기의 기술에서 『개밥바라기별』이란 작품이
하나의 새로운 표지석"이 되고, 그의 다른 작품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는 어떤 단초를
제공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적인 한 편의 소설로서는,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별 감동이 없이  읽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이전 소설들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뭔가 애매모호함이 가득한, 혹은
술 자리에서 군대 갔다온 친구 녀석의  '파란만장한 ' 이야기를 듣는 듯
지루하였던...

학창 시절 그의 중편 소설 "객지"과 "한씨연대기"를 읽은 이래
"장길산"이나 "무기의그늘" 그리고  근래에 들어 나온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넘어
잠들지 못하는 깊은 밤을 견디게 해주는 감동이자 위안이었다. .

누군가 그의 소설 "장길산"을 읽고 소설에 대한 외경심에
글을 쓰는 일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도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가 기록한 오월광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제목만으로
80년대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지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그의 역동적인 삶은 '문학의 현실적 완성'이라는
또 다른 미학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대통령과 함께 중앙아시아를 다녀온 그가 그랬다고 한다.
"광주사태가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70년대 영국 대처정부 당시
시위 군중에 발포해서 30-40명의 광부가 죽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라고.
또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고, 큰 틀에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귀국 후에 황석영은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실수였다고
인정하며 말꼬리를 잡지 말아달라고 했다.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이니 나는 그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지배권력으로부터 '사태'를 '민중항쟁'으로 인정받기까지
치뤄낸 값비싼 수고를 기억한다면,
더군다나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언어를 선택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소설가이며,
스스로  '80년 광주는 나의 영혼' 이라고 말하는 지식인이라면,
단어의 선택에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은 있다.
때때로 호칭은 모든 본질을 대신할 수도 있으므로.

문제는 그 다음이다.
70년대 영국과 프랑스 운운.
그가 기억하는 그 나라의 연대와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광주민중항쟁과는 비교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설혹 다른 나라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권찬탈의 야욕때문에 국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80년 신군부의 살인자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 듯한 '큰 틀'의 논리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동의할 수 없다.

만약에 현재 이라크의 한 소설가가  
'미군에 의한 양만학살은 이라크에만 있는 것인 줄 알았더니 한국전쟁 중에
한국에서도 있었고, 베트남전쟁에서도 마찬가지' 라고 하면서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고 큰 틀에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는 발언을 한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거 뭐 또라이 아냐?" 밖에 없을 것이다.
그와 동일한 평가를  이번 '광주사태' 를 외국의 사례와 비교분석한
황석영의 '큰 틀'에 내린다고 해도 틀리지 않아보인다.

동시에 나온 그의 이른바 '몽골연합론'이나 '알타이 경제문화연합론'도
내겐 지난 대선 때 몽고와 통일을 하겠다던 어떤 후보의 공약만큼이나 허황되게 느껴진다.
엉덩이에 같은 푸른 반점을 갖고 태어났다는 점 이외에
현실적으로 그다지 뚜렷한 언어적, 문화적, 지리적 공감대도 없는 나라와 '연방제'까지
고려할만한 무슨 다른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 '큰 틀'의 시각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몽골에서는 이런 우리 쪽의 발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그 논지의 골자는 남북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꾼 뒤에  
남아도는 북의 군사력과 남의 청년실업군들을 투입하여
몽고의 '비옥한' 땅을 '개발'한다는 것인데,
황석영이 전하는데로 발상의 '지적소유권'이 이명박대통령에게 있어서 그런지
어째 내게는 강바닥 뒤집으려던 '삽질경제'의 해외버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까라면 까야 하는' 군바리나 일자리 없는 젊은이는 명령만 하거나
일거리만 있으면 허허벌판에 삽 한자루만 쥐여줘도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내가 당사자라면 좀 서러워질 것도 같고.

그 자리가 황석영의 개인작업실도 아니고 문학토론장도 아닌 대통령을 수행하며
기자들과 함께 하는 공적인 자리인 이상 '작가적 상상력'이란 변명도 궁색해 보인다.
아무튼 황석영은 '유라시아특임대사'라는 뭐하는 직책인지는 모르되 이름만은
거창해 보이는 '벼슬'에 내정되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출처 : 손문상화백의 그림

사람의 생각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황석영이 불과 일년 반 전에 수구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 없다며
민주세력의 단일화를 주장하였다고 해서 언제나 '반이명박전선'에
서있어야한다는 보장도 의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수구세력'이 별안간 어째서
'중도실용'으로 평가되어야 하는지, 이명박의 중도실용은 무엇인지 등의
최소한의 보충설명은 있었어야 했다.

이명박정권이 집권 이후 일관되게 집행해온 정책이란 것이
'용산참사'에서 보듯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축소해온 것임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인 터에 말이다. 더군다나 그나마 정착되어가던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미네르바의 경우에서처럼 후퇴시킨 것도 이정권 아닌가.
우회전금지구역에서도 마구잡이 우회전을 하고 있는 그 억지 정책들에 붙여진
'중도실용'은 황석영의 별명처럼 너무 '구라스럽다'.
혹『개밥바라기별』의 '느슨함'과 이번 그의 돌출 행동이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먼 몽골의 평원에 눈을 돌리기 전에
인터넷 초기화면이나 신문 한 장만 보아도 .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절박하고 절망스러운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고 혼자서 다짐하며
입으로 남포를 물던 그의 소설 "객지" 속의 주인공 동혁처럼,
그 칼날 같은 경계를 딛고 서서 심지 굳은 목소리로 희망을
일궈내어 우리에게 나눠주던 이가 황석영 아니었던가.
그래서 아직 나는 황석영의 책을 책장 속 그 자리에 놔두려고 한다.
그의 책은 여전히 제목만으로 빛난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글대로) 살아야한다"고.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오월광주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황석영이 그 말을 기억하기를 바랄 뿐이다.

(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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