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캄보디아

2003 캄보디아 여행기 3. - "과거를 묻지 마세요"

by 장돌뱅이. 2012. 4. 6.


*캄보디아의 돈 1000리엘 (0.25불)

뽀첸통 공항에서 시내로 나가는 공항 택시는 고정 가격 7불이며 '모또'는 2불이었다.
여행짐을 가진 외국인 입국자들은 '모또'보다는 공항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해 보였다.

모또는 동남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토바이 택시를 말하는 것으로 캄보디아에서는
자전거를 개조한 씨끌로와 더불어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었다.
특히 모또는 미터택시나 버스의 존재가 전무하거나 열악한 상황의 프놈펜에서 단거리를
이동하기에는 가장 편리하고 신속한 교통수단이었다.
어디든 그렇듯이 타기 전에
가격 흥정은 필수였다.
프놈펜 시내의 웬만한 거리는 0.5불(2000리엘)이면 갈 수 있었다.


프놈펜의 한 한국식당의 사장님이 먼저 1천 리엘을 제시하고 안되면 2천 리엘을 주라고
알려주었지만 캄보디아에 있는 동안 한번도 1천 리엘을 주고 타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흥정도 없이 무조건 2천 리엘을 주고 다녔다.


*공항 택시 카운터 - 프놈펜엔 미터택시가 없다.

프놈펜에서, 아니 캄보디아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문제는 통용화폐의 혼란이다.
여행자에게 그것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겠으나
적어도 캄보디아의 경제적 상황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볼 수는 있겠다.

캄보디아의 화폐단위는 리엘(RIEL)이다.
(리엘은 원래 캄보디아의 전통음식인 쁘라혹을 만드는 주재료인 물고기의 이름이다.)
캄보디아에 체재하는 동안 한번도 환전을 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미화 1불이 4,000리엘
정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지화로 환전을 하지 않아도 여행자의 입장에서 전혀 불편한
점이 없었다. 외국인이 다니게 되는 모든 곳에서 사용화폐는 미국 달러였다. 식당이나 카페,
심지어 박물관이나 왕궁의 입장료도 모두 달러로 명기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리엘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는 모또나 씨끌로를  탈 경우나 길거리가게에서 음료수를 살 때였다.
환율은 불리하겠지만 태국 화폐 ‘바트’도 사용되었다.

다국적 화폐가 실생활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된다는 사실에서 캄보디아 사회의 대외의존성과
자국화폐의 불안정성, 다시 말하면 캄보디아 경제의 취약함을 읽을 수 있었다.


*똔레샆 강의 야간 풍경


*강변을 따라 이어진 씨소와쓰 SISOWATH 거리의  야경

다음은 차량운전석의 혼란이다. 캄보디아는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그러니까 운전석이
차량의 왼쪽에 있고 도로의 오른쪽으로 주행해야한다. 그러나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량도 많았다. 주행은 모두 오른쪽으로 했다.

비즈니스로 만났던 캄보디아인 B는 운전석이 반대편에 있는 차량은 밀수 등의 비정상적인
경로로 들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차도 운전석이 반대편에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태국에서 이런 말을 하니 한 태국인은 캄보디아의 그런 차들은 밀수
이전에 모두 태국에서 훔쳐간 장물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한글 상호가 쓰인 차들도 많았다. 무슨무슨 유치원이며 무슨무슨 태권도 하는 상호에
전화번호까지 선명하게 쓰인 합승차들은 아마 IMF 경제시기를 전후하여 붐을 이루었던
우리나라 중고차 수출의 결과일 것이다.

태국과 베트남의 사이에 낀 지정학적 위치는 캄보디아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으나 아직은 그렇지 못한 듯 하다. 수십 년간의 내전이 캄보디아에 제조업의
존재를 말살 시켰다. 대부분의 생필품이 주변국에서 들어오면서 프놈펜의 생활비가
방콕보다 비쌀 정도라고 한다.

프놈펜의 전체적인 모습은 한 나라의 수도로 보기에는 다소 열악해 보였다.
낡고 오래된 건물은 우리나라의 중소도시를 연상케하고 도로는 그런대로 포장은 되어
있으나 주변이 정리되지 않아 흙먼지가 날리거나 물이 고여 질척였다.
수도가 이 정도이니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의 상태는 상상해 볼 수 있겠다.

또 다른 캄보디아인 P는 “현재의 캄보디아를 말하자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오히려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더 크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 달에 있는 캄보디아 총선이 평화롭게 끝나주길 희망했다.

98년처럼 유혈사태가 반복되거나 이전의 혼란 상태로 간다면 캄보디아에는 희망이 없지 않느냐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정치와는 전혀 관심없이 살고 있는데
캄보디아의 정치는 늘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이래 캄보디아에서 정치는 저주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태국과 베트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댄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에서처럼
자원의 수탈에만 눈독을 들였고 1953년 독립 후에는 쿠테타와 내전과 혁명의 소용돌이에,
월남전까지 캄보디아 영토로 확대되면서 수백만의 사람이 죽고 국토는 피폐해져 갔다.
비옥했던 평야는 이제 숨겨진 미국산 지뢰들로 인해 버려진 땅이 되었다고 한다.

출장길에 만난 캄보디아인들이 일관되게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고 말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