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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캄보디아

2003 캄보디아 여행기 6. - 또 하나의 킬링필드.

by 장돌뱅이. 2012. 4. 7.


* 위 사진 : 왕궁 앞 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며 포즈를 취해 주었다. 
               저 아이들의 세대에는 참혹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빌어 보았다.  
 

     “캄보디아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도널드 도슨, B-52 부조종사-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헨리 키신져, 미 안보 고문 -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망하고 떠나자 미국은 경제원조라는 미명으로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1964년 8월의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에 나선다. 미국 대통령의 ‘엄숙한’ 발표에 따르면 “북베트남의
통킹만 밖 공해상을 순찰 중이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사건은 미국군부가 북폭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개월 전부터 치밀하게
모든 상황을 추진해온 연출극이었다는 사실이 펜타곤의 비밀문서가 세상에
폭로되면서 알려진 바 있다.)

통킹만 이후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가 병력을 파견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국제전 양상으로 치달았고 전장도 점차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포함하는
‘인도차이나’ 전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베트콩들이 남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공산당과 북베트남의 연대를 끊어야한다”

캄보디아 비밀폭격을 주도한 키신져의 논리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1969-73년에 걸쳐 B-52 전략 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4만톤에 달하는 각종 폭탄을 투하했다고 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폭탄의 3배를넘는 양이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의 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미국 스스로 국방장관에게도 보고되지 않은 이 극비불법폭격을 통해 60만에서 80만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이 죽임을 당했다.
물론 그들은 베트콩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 이었다.
또 하나의 ‘킬링필드’였던 것이다.

모든 관련자들이 학살의 ‘최고명령권자’로 닉슨 대통령과 헨리키신져를 지목했다.
전쟁선포도 하지 않은 중립국에 융단폭격을 가하고 사전에 공습경보 한번 내리지
않았으며 제네바 협약에 금지된 네이팜탄과 에이젼트 오렌지를 사용하여 양민을
학살한 책임자 키신져는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려 1973년에는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대신에 캄보디아 불법폭격을 고발한 공군 대위 도널드 도슨(서두 인용)은 폭격
명령거부죄로 법정에 세워졌다.

1975년 12월의 미 국무부 회의에서 키신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국익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외교관은 미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외교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중동지역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태를 통해 우리는 키신져의 후배들이 그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실천하는 ‘범생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 사진 : 왓프놈 앞 도로의 평온한 아침 풍경.

1997년부터 미국(공식적으로는 유엔)과 캄보디아간에 ‘킬링필드’의 학살범 재판회부를
위한 회의가 열리고 있다. 캄보디아 수상 훈센은 이 회의에서 걸핏하면 “1969년부터
73년에 벌어진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카드를 빼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미국은 경제지원의 홍당무와 협박의 채찍을 사용하여 결국엔 미국의
뜻대로 크메르루즈가 집권한 1975-79년의 기간만 재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재판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과거사의 책임을 모두 크메르루즈에게
넘기려는 미국과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자신의 취약성을 재판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훈센이 유엔이라는 화려한 간판의 나이트클럽에서 만나 ‘학살범 처단’이란 폭탄주를
나누어 마시며 부루스를 추는 추악한 불륜의 드라마였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만행을 저지르고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지 않을 때
섣불리 용서와 화해를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배웠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도 아직은 사실을 밝혀내고 알려야 할 역사이다.
힘을 가진 자들에겐 고백하고 참회하여야 할 의미이고.


*위 사진 : 센트럴마켓 부근에서 만난 모또 운전수, 너무도 순박한 인상이었다. 

나의 여행기는 이제 프놈펜을 떠나려고 한다.
가난과 전쟁과 살육의 끔찍한 시간을 헤쳐 나왔으면서도 놀랄만큼 순박하고
다정해 보이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너무 거칠고 엽기적인 내용으로만 여행기를 채우고 말았다.
나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좀더 잔잔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쓰려면 아마 나의 여행의 연륜과 생각의 깊이가 더해져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프놈펜도 캄보디아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글은 이영희의 <베트남 전쟁>과 재캄보디아 한인회보 창간호 중
 정문태의 글 “킬링필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을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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