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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캄보디아

2003 캄보디아 여행기 5. - 뚜얼슬랭 감옥과 킬링필드.

by 장돌뱅이. 2012. 4. 6.

 

1980년대 롤랑조페의 영화 ‘킬링필드’가 우리나라에서 필수적인 교양영화처럼 부각되었던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하여 영화로서의 ‘공정성’과 ‘예술성’을 보장받은(?)
이 영화는 당시 우리 사회의 군인통치하의 각종 언론을 통해 유난스레 선전, 강조되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 대하여 누구나 한 가지 사실만은 자신있게 말하게 되었다.
“킬링필드란?”
“크메르의 공산당이 혁명을 위해 무수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곳!”
“얼마나?”
“이백만 명씩이나!”
바로 그 ‘전설’을 만들어 낸 영화이다.

나는 그때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대단한 안목이나 판단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75년 월남전 패망 이후 보트를 타고 탈출한
월남 난민들을 받아들여 TV 중계까지 해가며, “국가안보가 있어야 개인의 삶도 있다”는
패전국 국민의 눈물어린 ‘신파’로 위기감을 고조시켜 정권의 추악함과 부당함을 감추고
국민들의 점증하는 불만을 잠재우려는 ‘관제 반공 도덕 교과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직접 보지 않았지만 그 ‘명화’의 내용까지 모르지는 않는다. 
영화 “킬링필드”는 “시드니라는 뉴욕타임즈 기자와 그를 도운 캄보디아 현지 기자 사이에
폴포트가 집권한 ‘1975-79년’ 이라는 정치적인 공간을 집어넣고 이별과 만남같은 통속적인
주제로 감성을 자극해 크메르루즈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킨 영화였다.”고 한다.
(캄보디아 여행에서 돌아와 동네의 비디오가게를 돌며 킬링필드를 찾아보았지만 구하지 못했다.)

이 영화 한편으로 캄보디아는 ‘죽음의 땅’으로 크메르루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집단’
으로 우리 국민과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렸다.


*위 사진 : 뚜얼슬랭 감옥,  철조망에 전기가 흘렀다고 한다.

일상을 떠나와 홀가분한 여행자에게 뚜얼슬랭 감옥과 킬링필드는 어떤 의미로건 너무
무겁고 끔찍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우선 옛 고등학교였던 ‘뚜얼슬랭(TUOL SLENG)과 그리고 프놈펜 외곽의 평범한
들판인 ‘쯔응 액(처웅 액?, CHEOUNG EK)이 크메르 루즈의 집권 44개월 동안 공산주의
체제 건설을 위해 수많은 이른바 ‘인민의 적’들을 감금, 고문, 처형한 현장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킬링필드’가 알려주었던 이른바 ‘광기어린 공산주의 이념’이 빚어낸 ‘무자비한
폭력과 극악무도한 만행’의 기억 말이다.
그러나 그 무거움과 우울함의 역사를 되새기지 않고는 오늘의 캄보디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여행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잔인했던 감옥문이 닫히고
살육의 현장엔 풀이 돋아난지 오래지만 그것들을 만들어낸 정치적인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을뿐더러 아직도 희생자들의 두개골 위에서 유령처럼 군림하며 죽음의
의미를 희롱하고 그곳을 찾는 우리들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음을 생각하면 킬링필드는
캄보디아의 이해를 위한 첫 관문일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은 캄보디아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되어버린 그런 현장이 처음부터
캄보디아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베트남이란 외세에 의해서 발굴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엇인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배경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 위 사진 : 프놈펜 교외 쯔응 액CHEOUNG EK에 있는 킬링필드.
                앞 부분의  구덩이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해낸 곳이다.
                추모탑에는 유골들이 성별 나이순으로 분류되어 있다.  

1975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크메르 루즈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LONELY PLANET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IT IS STILL NOT KNOWN HOW MANY CAMBODIANS DIED AT THE HANDS OF
   THE KHMER ROUGE OVER THE NEXT FOUR YEARS. THE VIETNAMESE CLAIMED
   THREE MILLION DEATH, WHILE FOREIGN EXPERTS LONG CONSIDERED THE
   NUMBER CLOSER TO ONE MILLION. YALE UNIVERSITY RESEARCHERS
   UNDERTAKING ONGOING INVESTIGATIONS CONCLUDED IN EARLY 1996 THAT
   THE FIGURE IS AT LEAST TWO MILLION, AND EVEN END UP BEING HIGHER. 
                                                          -LONELY PLANET CAMBODIA 20쪽-

300만이라는 베트남의 추정치가 흥미롭다.
다른 어떤 자료보다 크메르루즈의 잔학성에 대한 베트남의 고발은 강도가 높고
세밀하다. 베트남이 박물관으로 만든 뚜얼슬랭의 감옥의 현황판에는 살해 혹은
사망자의 수가 3,314,768명이라고 단 단위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왜 베트남의 추정치는  높을까?
그것은 1978년 크리스마스를 기해 캄보디아를 침략한 자신들의 행위를 폴포트 정권에서
캄보디아 인민들을 해방시킨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폴포트의 폭압이 강조되면 강조될 수록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명분이 설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캄보디아 점령 후 곳곳에 ‘킬링필드’를 발굴하였다.

어떤 논리로건 베트남의 침략전쟁은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차이나에
대한 패권주의의 노골적인 추구”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아니며 그 전쟁으로 다시 한번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고통을 받으며 죽어갔다는 사실 때문에도 그렇다.

그렇다면 현 캄보디아 수상인 훈센은 왜 그런 사실을 묵인한 채 베트남이 만든 박물관에
아직도 희생자의 유골을 전시해 놓고 있는 것일까?
그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함락시키고 세운 정부의 요직을 지냈던 인물인 것이다.
때문에 그 역시 베트남과 동일한 정치적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크메르 루즈에서 이탈한 자신의 전력에 합당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97년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크메르 루즈의
잔학성과 캄보디아 인민의 피해를 ‘킬링필드’식으로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킬링필드와 뚜얼슬랭을 찾아보는 것은 관람객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치적인 의미를 담게 된다.
우리는 고문과 살육의 처참한 현장에서 전율하고 소름을 느끼고
누군가를 애도하거나 저주하게 되겠지만
그런 감정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 이전에
어떤 집단이나 체재에 의해서 교묘하게 기획되고 의도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제의 뚜얼슬랭과 킬링필드는 고문과 처형의 한스런 지난 역사가 스민 현장이자 현재의 살아있는 정치적 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 시기에 죽은 사람의 수는 연구자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극단적인 추산을 피한 연구자료에 의하면 처형된 사람의 수는 10만에서 30만명이고
기아와 질병과 중노동으로 죽은 사람이 70만명 정도로 크메르 루즈 시기에 죽은 사람의
수는 위의 인용한 론리플래닛에 언급된 것처럼 100만명 정도이다.

그러나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론리 플래닛에서 빼먹은 것이 한 가지 있다.
크메르 루즈 시기의 기아와 질병 사망자는 미국이나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갑자기 차단해버린 데서 비롯된 일이기도 해서 크메르 루즈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위 사진 ; 뚜얼슬랭 감옥 내부

모또를 타고 찾아간 비밀감옥 ‘S-21', 뚜얼슬랭엔 지난 시기의 잔인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비명으로 얼룩졌을 고문방과 각종 도구들, 희생자들의 처참한 사진, 이곳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한 화가가 기억을 더듬어 그림으로 재생해낸 끔찍한 살육의 장면들,

좁은 감옥방, 검은 족쇄,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건물 그리고 희생자의 두개골......

한때는 그 두개골로 캄보디아의 지도 모양을 만들어 걸어놓았다고 하던가.

지금은 해골지도는 철거된 대신에 두개골만 진열장에 전시되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곳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했다.
그것은 올바르게 정리되지 못한 역사 때문에 어쩌면 구천을 맴돌고 있을 그들의 영혼을
또 다시 고문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감한 심정으로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푸르렀고 햇살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초록의 잔디 위에 늘어선 야자나무 잎은 바람의 방향으로 가볍게 쏠리고 있었다.
그 곁에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옛감옥이 괴물처럼 흉하게 서있었다.
20세기의 인간들의 생각으로만들어진 이곳을 정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뚜얼슬랭만으로 충분하여 사실 킬링필드는 그다지 가보고 싶지 않았으나 모또 운전사의
권유는 나의 지친 감정보다 끈질겼다. 사는 일도 죽는 일만큼이나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입안으로 날려 들어오는 흙먼지를 뱉어내며 오토바이 뒷자리에 매달려 간
킬링필드는 장소만 다를 뿐 뚜얼슬랭과 동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킬링필드의 희생자 추모 위령탑에는 뚜얼슬랭보다 훨씬 더 많은 8,000 여개의 유골이
성별, 연령별로 분류하여 전시되고 있었다. 두개골 사이로 쳐진 거미줄이 소름을 돋게 했다.

크메르루즈의 잔학성이 정치적인 이유로 실제보다 부풀어지고 과장되어 이용되고
있다고해서 ‘킬링필드’(무엇으로 부르건 간에) 존재에 대한 크메르루즈의 알리바이가
성립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들이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 질 수도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크메르루즈의 혁명정권은 화폐통용금지, 무역금지같은 극단적인 정책들을 남용하고
자신들의 혁명 완성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여 처형함으로써
외부세계에는 자신들이 이룩한 혁명을 부도덕한 것으로 비판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고
내부적으로도 반제, 반미투쟁으로 결집된 민족적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국가건설에
활용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베트남의 침공으로 밀림 속으로 퇴각했던 폴포트는 1998년 4월 사망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주도한 혁명과 그 과정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았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의 사망과 더불어 크메르루즈도 점차 소멸되었다.

그러나 아직 캄보디아에서 그의 족적은 지나간 과거이면서도 현실로 남아 있다.
킬링필드와 뚜얼슬랭이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지나간 시간을 고발하는 현장이면서
동시에 현실 정치의 민감한 부분을 딛고 선 정치적 선전소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우리가 캄보디아의 현재와 과거 그 어느 시기를 증오하거나
혹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건 간에 말이다.

  “진정으로 그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었다면 화장을 하고 진혼제를 올린 후
  뚜얼슬랭의 마당에 진혼탑을 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캄보디아.
  그것이  오늘의 캄보디아다.”     

                             -유재현의 인도차이나 여행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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