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미국

시애틀4 - 다시 MOUNT RAINIER

by 장돌뱅이. 2013. 8. 27.

다시 시작한 비는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비록 나의 계획을 흩트려 놓은 낮 동안의 비는 짓궂은 심술쟁이였지만 빗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특히 밤비는 정답게 토닥이는 듯한 소리와 운율로
방안의 아늑함을 고조시켰다. 
창문을 열고 아내와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세상이 온통 빗소리로 가득했다. 
창문으로 새어나간 불빛 속으로 바늘 같은 빗줄기가
무수히 드러나 보였다. 달고 깊은 잠을 잤다.
 


*위 사진 : 레이니어산

이튿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못 긴장된 느낌으로 커튼을 조금 재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지붕 너머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비는
그쳐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카메라를 들고 혼자 숙소 밖으로 나왔다.


레이니어산의 정상부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18세기 말 태평양 연안을 항해하던 한 영국 해군의 함장이 멀리서 이 산을 보고 자신의 친구 이름을 따서 레이니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면 좀 웃기는 일이다.
배를 타고 가다가 불렀는데 그게 이름이 되다니!

그 해군 함장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올바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세상 일의 기본이다. 
정작 그 친구는 이곳에 한번도 와보지 않았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이 산을
타코마 TACOMA산이라고 불렀다. 
이름은 고유 명사이지만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혼란의 세상은 종종 이름부터 바꾸어 놓고 또 세상의 많은 혼란은 올바른 이름을 부르지 않아 생겨난다. 
독도를 타케시마로 바꾸어 부르려는 거짓처럼 말이다. 
 


 *위 사진 : 머틀폭포 가는 길

숙소에서 가까운 머틀 MYRTLE 폭포까지 가는 길을 걸었다. 온통 눈밭이라 길이 나있지 않았지만 공원 관리소에서 
꽂아 놓은 가이드 깃대를 따라 걸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바람도 없어 정적만 가득한 길이었다. 폭포는 대부분 눈에 가려있었다.

눈 밑으로 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 산책이었다.

 


*위 사진 : 머틀폭포 

 


*위 사진 : 머틀폭포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 파라다이스인과 주변 풍경 


*위 사진 : 니스퀄리 트레일

숙소로 돌아와 카페에서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아내는 느긋했지만 나는 언제 또 비가 시작될지 몰라 조급했다. 
비지터 센터 뒤쪽의 왕복 2KM 정도의
니스퀄리 트레일 NISQUALLY VISTA TRAIL부터 걷기로 했다. 원래는 어제 걸으려했던 길이다.
짧고 쉬우면서도 걷는 도중 거대한 니스퀄리 빙하와 레이니어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골랐다.
그런데 이 날은 눈과 나무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구름이 먼 시야를 완고하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아이젠 없이 걷는 눈길이라 자주 뒤뚱거리며 걸어야 했다.
 

 


*위 사진 : 나라다폭포

트레일을 빠져나와 날씨가 허락하는 한 산 아래 롱마이어 쪽을 향해 내려가며 이곳저곳을 보기로 했다. 
나라다 NARADA 폭포는 도로변에 있어 접근이 쉽다. 

주차장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전망대가 있어 폭포를 감상하기에 좋다. 
높이가 무려 50미터에 이른다. 수량도 풍부하여 아래 쪽에서 올려다보면 위엄까지 있어 보였다. 
아내는 폭포의 물보라가 날리는 전망대 끝까지 걸어가 일부러 물에
젖어보기도 했다. 
폭포를 보고 주차장으로 올라오는 길에 드디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틴 CHRISTINE 폭포는 나라다폭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폭포 바로 아래를 차가 지나기에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작고 아담한 모습의 폭포이다.
 

비가 점점 거세졌다. 우리는 롱마이어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롱마이어는 어제 들어왔던
니스퀄리 입구에서 10KM 정도 들어온 곳에 있다. 1873년 63세의 롱마이어라는 노인이 
정상 등반에
성공하고 하산하는 도중에 온천을 발견하여 개발을 진행했던 곳으로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는 안내소와 레이니어 산의 지리와 역사, 서식 동식물의 자료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을 나오니 비가 가늘어 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은 다시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제 비지터센터의 직원이 추천해준 카터 CARTER 폭포로 가는 트레일이 욕심이 났다.
그 길로 향하는 계곡으로 내려서는데 다시 비가 쏟아졌다. 
기왕 비옷을 입었고 길도 평평하다고
들었으니 강행을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위 사진 속 다리 부근에서 발을 돌렸다.
 

차를 옮겨 숲을 마주보는 장소에 세웠다. 그리고 의자를 뒤로 재끼고 비스듬히 누워 비 내리는 숲을 바라보았다. 
비는 폭우에 가까웠다. 유리창에 비가 흘러내려 시야를 막았다.

숲을 보기 위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윈도브러쉬를 작동 시켜야 했다. 
롱마이어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림 중의 하나라고 한다. 바라보볼수록 풍요로운 느낌에 빠져드는 숲이었다.

미국에서 다녀본 몇몇 국립공원, 그중에서도 옐로우스톤과 요세미티, 세콰이어공원 그리고 이곳 레이니어산의 숲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깊으면서 크고 다양하면서 넓었다. 아내와 나는 감탄을
넘어 “그래 그래 니들 잘 났다.” 하는 
시기어린 말을 자주 내뱉곤 했다.


그런데 미국의 모든 숲이 몇몇 국립공원과 같은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이미 1877년에 미국 내무부 장관이었던 칼 슈르츠는 “지각이 있는 이라면 이 나라에서 숲이 사라지는 속도에 경악할 것”이라며 
“지금 당장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데릭 젠슨과 조지 드래펀은 함께 지은 책 “약탈자들”에서 
정부와 기업과 환경
단체의 유착으로 산림 파괴가 가속된다고 적었다. 

  
미국삼림제지협회(AF&PA)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과 기업 환경”을 촉진
   하고자 
   목재회사와 제제회사와 통상 협회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삼림제지협회와 회원
   기업들은 1991년 
   부터 1997년 6월까지 합법적 정치기부금으로 연방 정치인들에게 팔백만
   달러 이상을 내놓았다. 
   (...) 답례로 미국 삼림제지협회 회원사들은 같은 기간 동안 국유림
   목재 구입에 1억 달러 이상의 
   할인을 받았다.(...) 기업이 가장 높은 수익률을 얻는 것은
   정치인을 살 때임이 분명하다.

                                                                                    -위 책 "약탈자들" 중에서 -

숲을 파괴하는 자들의 명분은 다른 자연을 파괴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즉 ‘우리는 숲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휴지를 만들고 있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숲을 질병에서 구해내고 있다’, ‘지역 경제를 돕고 있다’, 등등.
여기서 ‘숲’을 ‘강’으로만 바꾸면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듣던 논리가 된다.
산과 물은 오랜 친구(山水大友)라고 했다. 자연은 서로 의존적인 존재들로 구성된 거대한 통합체이다. 
개별적인 존재만으로 완전해질 수 없다. 숲이 사라지고 물이 마른 환경은 결국
인간의 존재마저 위협할 것이다.

한참을 차안에서 쉰 후에 차를 돌려 다시 파라다이스로 올라갔다.
전망이 좋은 주차장 끝에 차를 세우고 산을 내려다보며 컵라면으로 점심을 하고 봉지커피를 마셨다. 
그 사이 비는 갑자기 눈으로 바뀌었다. 함박눈이라고 해도 좋을 크기의 눈이 바람에 밀려
사선을 그으며 휘날렸다. 
삽시간에 시야가 아득해졌다. 경이로운 날씨의 변화였다.
 

 

 

 

눈이 그친 후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개운해진 몸으로 로비에서 어제처럼 책을 들고 ‘좌선’ 모드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창밖이 환해졌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서둘러 나갔다. 
햇살이 비치고 놀랍게도 파란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고대했던 레이니어 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레이니어산을 보겠다고 
눈길을 오르는 사이 잠시 드러나는가 싶던 산은 거짓말처럼 회색
구름에 지워져 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쪽도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다시 산안개에 덮히고
있었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빛났던 화창함이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시인의 시 제목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저녁에 예상대로 다시 비가 내렸다. 날씨를 따라 우리 일정도 변화무쌍한 하루였다.
비가 그친 절묘한 타이밍에 숲길을 걸었고 폭포를 보았고 거짓말처럼 잠깐 사이에 고대했던 레이니어산의 정상도 보았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저녁이었다.
아내와 느긋한 마음으로 빗소리를 들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