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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시애틀3 - MOUNT RAINIER 국립공원

by 장돌뱅이. 2013. 8. 27.

오션쇼어 OCEAN SHORE의 숙소는 오션뷰라기보다는 오션‘쪽’ 뷰였다.
바다를 향하고 있지만 해변과 사이에 넓은 잡목 숲이 있어 바다는 숲의 끝 쪽에
치약을 짜놓은 것 같은 파도의 흰 띠만 조금 보일 뿐이었다. 날씨가 관심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재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는 잡목 숲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 처음엔 흐린 날씨지만
비는 안 오는구나 하고 안도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 밤새 내렸던 모양이다.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서니 비는 창문으로 볼 때 보다 더 많은 비였다.
옆자리에서 늘 나의 운전 태도를 체크, 관리, 감독, 통제, 지시하는 아내는 주행 속도를
낮출 것을 요구했다. 나는 모범운전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빗발은 점점 거세졌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습한 공기는 레이니어산(4300미터)을 넘으며 많은 비와 눈늘 떨구며
몸을 가볍게 만든다고 한다. 산으로 다가갈수록 숲은 점점 짙어지고 나무들은 우뚝우뚝
높아져 갔다. 과속을 할래야 할 수도 없었다. 네 시간 쯤이 지나서야 공원입구에 도착했다.
레이니어산의 4개의 출입구 중 남서쪽에 있는 니스퀄리 NISQUALLY 매표소였다.
겨울철에는 레이니어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가 된다.  

길은 점차 경사를 이루며 산허리를 따라 똬리를 틀었다. 나무 사이로 가끔씩 비로 불어난
개울물이 보였다. 산을 감싼 비안개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하고 모퉁이를 돌 때
별안간 차를 향해 뿌옇게 달려들기도 했다.  

파라다이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시야에 온통 안개와 비만 가득했다. 마치 뿌연 우유 속과 같았다. 
숙소에 들기 전 짧은 트레일을 걸을 예정이었으나
모두 접고 우선 비를 피해야 했다.  

파라다이스의 유명한 그리고 유일한 숙소인 파라다이스인 PARADISE INN은 1917년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레이니어산 중턱 
고도 1652미터 지점에 있다. 5월 중순에서 9월말
까지만 문을 연다. 121개의 방이 있어 성수기인 한 여름에는 예약이 쉽지 않다.

우리가 묵은 방은 트윈룸이었다. 일인용 침대가 2개 있고 욕실 이외에 최소한의 이동 공간만 있는 작은 방이었다. 
침구는 깔끔했고 폭신했다. 텔레비전은 없고
인터넷도 전혀 되지 않았다. 산에까지 와서 굳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이 작아서 그런지 로비 라운지로 나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로비와
붙어 있는 카페에서 카피를 주문해 마시거나 아예 와인을 들고 와 마시기도 했다.
카드놀이를 하는 가족들도 있었다. 벽난로 앞에서는 늙은 공원관리원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레이니어산과 파라다이스에 대해 옛날이야기를 하듯 설명을 했다. 저녁 무렵에는 피아노
연주도 있었다. 비에 갇힌 산 속에서 사실 할 일이란 게 매우 제한적이지만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들이 따분하거나 권태롭게 보이지 않고 나름 정겨워 보였다. 

 

로비 라운지는 천정이 높고 면적이 넓었다. 수평과 수직으로 얽힌 굵은 통나무들은 산장 분위기를 자아냈다. 
양쪽 끝에 큰 벽난로는 그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고 실내는
따뜻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그다지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내와 나도 로비로 나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책을 읽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구경했다. 
나는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투덜거렸지만 아내는 비오는 날 이렇게 쉬는
것도 너무 좋다며 느긋한 표정이었다. 
이틀 동안 계속 쏟아져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6월 말의 파라다이스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눈은 저만치 산 정상부로 밀려올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파라다이스의 상징적인 문구처럼
“야생화와 빙하가 만나는 곳 WHERE THE FLOWERS AND THE GLACIERS MEET”은
아직 못되더라도 말이다. 하루 전 올림픽공원의 풍경도 그와 비슷했으므로 나는 나의 예상을 확신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숙소 주변에는 찻길을 제외하곤 온통 눈이었다.
그것도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파라다이스에는 한해에 17미터 이상의
눈이 온다고 하더니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원 계획은 첫날 두 개의 짧은 트레일, 이튿날은 거리 8-9km 정도의 좀 빡센 스카이라인 트레일을 걸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내리는 비와 남아 있는 눈은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게 했다. 하긴 비가
그쳤다 하더라도 눈길을 걷기 위한 아무런 장비도 
가져오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래도 비만
그친다면 어디서 아이젠쯤이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조바심을 쳐야 했다.

아내는 소파에 파묻혀 책만 읽었다. 예상을 벗어난 여행지의 돌발적인 상황에 아내는 자주 노련한 고수처럼 빠른 적응력을 보여준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과감한 포기와 주어진 상황에
대한 만족이 아내의 장점이다. 
그것은 의지박약이나 비겁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다. 
사실 나의 안절부절은 집념이 아니라 계획에 대한 무모한 욕심과 집착에 있다.

자유로운 시간을 위해 떠나온 여행을 스스로 만든 계획으로 다시 얽어매는 어리석음이기도 하다.
(아! 이 말은 다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비는 왜 자꾸 내린단 말인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갑자기 목줄이 매인 강아지처럼 나는 끙끙거리다 지쳐 아내 곁에 앉아 시집을 펼쳐 들었다. 
그때 이런 시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분’이나 운명의 가르침인지 아니면
놀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도 여러 번 읽게 되었다. 
덕분에 마음도 차츰 가라앉았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안도현의 시, “일기”- 

저녁 무렵 잠시 비가 멎었다. 우리는 숙소 가까이에 있는 JACKSON VISITOR CENTER를 둘러보았다. 
여느 비지터센터처럼 이곳은 레이니어산에 대한 여러 자료와 동영상이
전시 되고 있었다. 한국어 자료도 있었다. 

 


*위 사진 : JACKSON VISITOR CENTER

그리고 숙소 앞 눈 쌓인 언덕에 올랐다. 물기를 머금은 눈은 발밑에서 쉽게 부서졌다.
아무 장비도 걸치지 않은 맨신발이라 미끄러웠지만 그것도 재미라면 재미였다.
어떤 사람들은 개구쟁이들처럼 웃음을 머금은 채 다분히 고의적으로 쉽게 넘어지기도 했다.
산 정상부는 여전히 구름 속에 들어 있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면 맑은 하늘이 되겠나? 나는 아직도 못 다한 미련을 내비치다가 이제 그만 욕심을 버리라는 아내의 충고를 듣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그쳤던 비는 날이 저물면서 다시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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