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시애틀을 향해 출발을 했다. 날을 흐려있었고 오는 듯 마는 듯 실비가 내렸다.
산을 다 내려와 레이니어국립공원을 벗어나기 직전 풀을 뜯는 사슴을 보았다.
거리를 유지한 채 차를 세웠다.
레이니어산의 이 온순한 토박이는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산을 떠나는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자연은 풀과 나무, 흙과 바위, 하늘과 바람, 비와 물만이 아니라 ‘스스로(自) 그러한(然)’ 조화와 평화였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종종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으며 지낸다.
5년이라는 미국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의 만남은 그런 우울한 일상에 대한 위로였고 치유였다.
이제 남은 일정은 시애틀이라는 대도시에서 보내는 이틀이다.
시애틀 공항으로 가서 4일 동안 사용한 차를 반납했다. 홀가분했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숙소는 시애틀 부두 북쪽에 위치한 THE EDGEWATER. 이름처럼 바로 바다와 접한 호텔이었다.
1960년대 처음 호텔을 열었을 때는 “FISH FROM YOUR ROOM”라고 광고를 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금지되었다. 일견 기발해보이는 것도 같지만, 글쎄... 호텔 방안에서 낚시한다는 게 실제로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언젠가 비틀즈도 묵어갔다는 이 호텔은 명성에 비해 수수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라 가방을 맡겨두고 시내로 나갔다.
호텔에서 무료셔틀을 운행해주었다.
*위 사진 : 바다에서 본 THE EDGE WATER. 조립식 주택처럼 조잡해 보이기까지 한다. 뒷쪽으로 높이 솟은
타워가 스페이스 SPACE NEEDLE이다.
첫 방문지는 시애틀의 유명 전통시장인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PIKE PLACE MARKET이었다.
문을 연지 100년이 넘은 시장으로 해산물, 과일, 채소, 공예품 등을 파는 시애틀의 ‘남대문시장’이다.
특히 연어와 게 등의 해산물은 이곳의 명물이다.
어느 곳이나 재래시장은 세련된 고객 서비스와 편의 시설로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마트와
대비되는 나름의 분위기가 장점이다. 일테면 떠들썩한 북새통과 자유로움, 끈끈한 정감과 생명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분위기는 여행자의 발걸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활력은 생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아무리 청소를 해도 썰렁하기만 할 뿐 인간의 체취가 묻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지역민들의 생활 속에 시장이 자리하고 거기에 여행자들의 흥겨움이 더해졌을 때, 융합된 활기는 폭발적이 될 것이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그런 조합의 좋은 예가 되겠다. 시장은 건물 안쪽은 상점들로 바깥쪽은 노점상들로 가득했다.
거리와 골목 통로마다 여행자와 현지인이 뒤엉켜 어디나 들썩이고 혼잡했다.
바로 우리가 시장에서 만나고 싶어 하던 것들이었다.
점심 식사는 시장 내 PIKE PLACE CHOWDER에서 했다. 사람들이 제법 긴 줄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줄은 신속하게 줄어들었다. 우리는 SALMON CHOWDER와 샌드위치를 골라 실외 자리에서 먹었다.
식사를 하고 스타벅스가 시작된 시장 내 1호점으로 갔다. 시애틀에선 흔한 스타벅스 대신에 TRULLY'S COFFEE나
CAFFE LADRO, CAFFE VITA 등에서 ESPRESSO를 마셔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아내와 나의 커피 수준(?)이라는 게 아직 '봉다리' 커피나 아메리카노를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1호점이라는 유명세를 뿌리치지 못한 여행객인지라 스타벅스로 향했다.
스타벅스는 허만 멜빌의 HERMAN MELVILLE의 유명 소설 모비딕 MOBY DICK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의 이름에서 연유하며
로고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 요정 사이렌 SIREN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시애틀이 미국 북서부의 주요 교역항이기에 그런 상상력이 가능했을 것이다. 스타벅스 1호점은 사람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사진을 찍고 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기념품을 사고 커피를 주문하고 - 우리도 그 순서를 밟았다.
커피를 들고 근처 공원의 벤치로 갔다. 비가 온 뒤라 더욱 강렬해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 날씨가 오래간만인지 날씨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다시 시장을 걸었다. 시장 중간쯤 청동 돼지상(像)에 사람들이 몰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름이 레이첼 RACHEL이었다.이를 만든 작가의 이웃에 살던 돼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레이첼에서 계단을 내려가니 씹던 껌을 벽에 붙여놓은 껌벽 GUM WALL이 있었다.
사전에 알고 있던 터라 우리도 껌을 씹고 갔으나 막상 벽 얖에 서니 껌을 붙이기가 주저되었다.
재미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좀 불결해 보였다. 도대체 이런 장난(엽기? 예술?)을 누가 왜 시작했을까?
시장 영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계속 길을 따라가니 SAM 이라고 부르는 SEATTLE ART MUSEUM 앞을 지나게 되었다.
시간 관계상 안에 들어가 소장품을 보진 않았다.
건물 입구에 세워진 낯익은 설치미술품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망치질 하는 사람 HAMMERING MAN”이란 제목의 검은 실루엣 형상의 작품이었다.
“노동자와 노동의 신성함을 상징” 한다고 했다.
아내는 기억을 더듬어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도 같은 작품이 서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이유였다.
박물관에서 해안 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두 쪽으로 내려갔다.
다리도 쉴 겸 그곳에서 시애틀 앞바다인 엘리옷 만 ELLIOT BAY를 오르내리는 한 시간짜리 하버크루즈 HARBOR CRUISE를 탔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시애틀의 시내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었다.
크루즈를 내려 MONORAIL을 타고 시애틀 센터 SEATTLE CENTER 로 갔다.
시애틀 어디에서고 보이는 높이 184미터의 스페이스 니들 SPACE NEEDLE이란 타워가 있는 곳이다.
모노레일 역에 내리니 스피커의 소음과 사람들로 혼잡했다. 타워뿐 만이 아니라 음악 체험 박물관 EXPERIENCE MUSIC PROJECT
라던가 과학센터 PACIFIC SCIENCE CENTER 등의 시설이 있어 원래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겠으나
이날은 특별히 센터 내의 공원에서 동성애자대회가 열린 탓이었다. 곳곳에 그들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다.
대회까지 열어가며 자신들의 존재의 정당성을 알린다는 것은 그들이 법적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일 것이다. 부당한 대우의 이유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적 지향이 질병도 아니고 어떤 치료나 교육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라면 동성애자에 대한 구분과 차별은 무의미하며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일 뿐이다. 더군다나 이성간의 사랑만이 진실하고 행복하다는 논리는 어디에도 성립될 수 없지 않은가.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정당성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한 평화’의 시간까지 아직은 모두의 관심과 개입이
필요하겠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억울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의 삶도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애틀센터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내친 김에 숙소까지 아내와 걸었다.
휴식을 취한 후 숙소의 식당 SIX-SEVEN에서 저녁을 먹었다. 바다와 접한 식당이었다.
바깥 좌석이라 바로 발밑에서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멀리 수평선 위에 올림픽국립공원의 산들이 떠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해가 졌다. 이내 서늘한 냉기가 바다로부터 다가왔다.
그래도 아내와 디저트까지 먹어가며 어두워지도록 세상에서 가장 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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