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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그냥 시카고에 갔다1

by 장돌뱅이. 2013. 9. 12.


*위 사진 : 시카고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 전시된 작품들.

시카고여행은 다른 여행에 비해 사전 준비나 지식이 거의 없이 출발하게 되었다.
그날그날 당일치기로 뒷날의 일정을 만들어가기로 하고 비행기와 숙소만 예약을 했다.
여행 일정도 짧은 데다가, 시카고 중심부만으로 여행 경계를 한정짓자 사실 준비할 것도
많지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기에 차를 빌릴 일도 없었다. 식사는 특별한 ‘맛집’을
찾아 이동하는 일 없이 숙소 주변이나 현재 있는 곳 주변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런 나의 게으름에 아내도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시는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밀집의 효율과 편리를 위해 빌딩이 세워졌을 것이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애써 찾지 않아도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
이었을 것이다.

시카고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 제법 있었다.
이번 아내와 나의 시카고행을 암암리에 부추긴 사람들이다.
마피아의 두목이었던 알카포네의 옛 악명이나 강한 호수의 바람과 살을 에는 겨울의 추위,
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한 가난과 범죄의 도시라는 단점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신에 거대하고 세련된 건물들이 이룬 ‘숲’의 화려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미술관과 박물관, 공원과 호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여행은 피할 수 없어 견뎌야 하는 운명이나 생활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이다.
어두운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추운 계절은 피하고 부담스러운 풍경은 찾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 도시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라도 말이다.

샌디에고를 출발하여 늦은 시간에 시카고의 오헤어(O'HARE)공항에 도착했다.
샌디에고와 시카고는 두 시간의 시차가 있다. 시카고가 앞서간다. 서울과 방콕의 차이와 같다.
아내와 나는 종종 방콕을 기준으로 여행지를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짐을 찾고 나와 택시를 기다리다가 아내가 꺼낸 이야기도 그랬다.
“꼭 방콕의 돈무앙 공항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것 같애.”
그러고 보니 고가도로나 공항의 출입문 등이 좀 깨끗하다는 것을 빼곤 돈무앙과 비슷하기도 했다.

9월 하순의 시카고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의 기온이었다.
불과 며칠 전 샌디에고의 날씨가 섭씨41도까지(아내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온도였다!) 치솟았음을
생각하면 미국엔 정말 다양한 자연환경이 공존한다. 다양함은 땅덩어리의 크기에서 나온다.
개그콘서트 정여사의 말투로 하자면  “크다는 것은 이미 알지만 이건 커도 너---무 크다!”

숙소는 시카고강 CHICAGO RIVER 남쪽에 접해 있는 MONACO 호텔이었다.
시카고강 남쪽의 빌딩 밀집 지역인 THE LOOP와 강북의 번화가인 MAGNIFICIENT MILE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편리한 위치가 장점인 곳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캔을 들며 아내와 여행 첫날을 자축했다.

이튿날 아침 시카고 최대의 중심가인 LOOP 지역 구경에 나섰다.
LOOP란 이름은 1800년대 말 시카고 중심부를 돌던 고가 철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굴지의 국내외 기업과 기관을 비롯하여 상가와 오피스텔 등의 높은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세계에서 2번째로 높다는 SEARS TOWER도 이곳에 있다.

시어스타워를 1차 목표로 삼고 걸어가기 위해 숙소 앞 강변길에 나가자 제일 먼저 옥수수 모양의
쌍둥이빌딩 MARINA CITY가 눈에 들어왔다. 주거용, 주차용, 보트정박장, 식당, 극장, 호텔 등의
다용도로 쓰이는 61층의 건물로 1960년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하 시카고에서 각 빌딩에 대한 소개는 무엇보다 아는 바가 없고, 건축에 대한 지식이나 심미안도
없으며, 일부러 책자나 인터넷을 뒤져 간단한 메모를 단다고 해도 끝이 없을 것이므로 생략한다.
다만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이루어진 건물들도 이렇게 모여 있으니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이나
차가움 대신에 나름 품격과 운치 혹은 위용이 있어보였다는 느낌만은 말해두어야겠다.

느린 걸음으로 강변을 따라 가다가 시내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얼마 걷지 않았는데
시어스타워가 나타났다. 2009년에 건물 소유주가 바뀌면서 공식 이름이 WILLIS TOWER로
바뀌었으나 사람들 사이에선 여전히 시어스타워란 이름이 통용된다.

전망대는 건물 꼭대기 103층에 있다. 시카고 최고의 높이에서 본 전망은 기대했던 것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 낮게 드리운 탁한 구름 때문에 하늘도 호수도 도시도 지평선도 모두
제 본래의 빛을 잃고 시들해 보였다.

시어스타워를 나와 밀레니엄 파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빌딩 사이에 설치된 설치미술품 몇 곳을 보면서 갔다. 루프 지역에는 유명 미술가들이
만든 수십 개의 설치미술품들이 산재해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미술품을 찾아보는 일정을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그 중에 3개뿐이다.
시어스타워 1층 로비에는 ALEXANDER CALDER라는 사람의 THE UNIVERSE 라는 작품이
리셉션의 벽면 장식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동화적인 색채의 따뜻한 느낌이 나는 작품이었다.

다음은 PABLO PICASO 의 "무제 UNTITLED"란 제목의 작품.
만든 피카소라도 이름을 붙이기 힘들었을 것 같은 난해한 작품이지만
그곳에서 미끄럼을 타며 노는 아이들로 해서 편안해 보였던......

피카소 작품 길 건너 맞은 편에는 JOAN MIRO의 MIRO'S CHICAGO란 작품이 있다.
무려 15년 이상의 공을 들여서 MIRO로부터 기증을 받았다고 하는데......
(말을 끝맺지 못하는 것은 작품과 제목의 상관성이 내게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끙!)

루프지역의 빌딩들은 마치 레고조각을 끼워 올린 것처럼 가파르고 높았다.
빌딩 사이로 난 도로는 마치 깊은 계곡처럼 보였다.

밀레니엄 파크는 시카고를 대표하는 공원인 GRANT PARK의 북서쪽 모서리부분을 말한다.
이름을 보아선 새로운 세기를 겨냥해서 만든 것 같은데 정작 공원이 문을 연 것은 2004년
봄이었다. 원래 예정했던 예산보다 많은 수억 달러의 공사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강낭콩처럼 생긴 CLOUD GATE 이다.
무게가 110톤이나 나가는 육중한 체중을 지녔음에도 위압적이지 않고 매우 귀엽다.
은빛으로 빛나는 둥근면에 주변 건물들을 휘어진 모습으로 비친다. 사람들은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즐거워한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사진을 찍었다.
맑은 날씨였다면 더 멋진 반영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한번 더 오기로 했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ITALIAN VILLAGE란 곳에서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었다.
1927년에 문을 열어 85년이나 된 식당이었다. 식당은 3층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 역사와 많은 인파에 비해 스파게티의 맛은 그저 그랬다.
아마 우리가 시간 관계상 가장 빨리 나오는 TODAY'S SPECIAL을 시킨 탓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급했던 이유는 시카고 컵스의 야구경기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야구장으로 향했다.

식당 근처 MONROE 역에서 RED LINE EL(고가철도, ELEVATED TRAIN)을 타자 시카고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 WRIGLEY FIELD가 있는 ADDISON역까지는 20여 분쯤이 걸렸다.
시카고컵스는 내셔널리그 하위권으로 올해 플레이오프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팬들은 그것에 개의치 않는지 역에서 내려 구장까지 걸어가는 길목은 잔칫날처럼
들썩이는 분위기였다. 매표구는 혼잡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컵스의 부진한 성적이 행운이었다.
만약에 리그우승이나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와일드카드가 걸린 일전이었다면 입장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리글리필드는 1914년에 개장하여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보스턴의 FENWAY PARK)로
오래된 구장이다. 오랜 시간은 숱한 사연들을 앙금으로 남겼다.

1932년 뉴욕양키즈의 전설적인 강타자 베이브 루스 BABE RUTH는 시카고컵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리글리필드의 센터 쪽을 가리킨 직후 정확히 그곳으로 홈런을 쳤다는, 이른바 ‘예고 홈런 CALLED SHOT'의
전설을 만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어느 신문기자가 만들어낸 ’설‘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찌 되었건
리글리필드에 얽힌 사연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리글리구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1937년에 제작된 낡은 스코어보드이다.
모든 구장이 최첨단 전광판으로 바뀌었음에도 리글리에서는 이닝별 득점 현황을 손으로
적어서 끼우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아내와 내가 연애시절 고교야구를 보던 70년대
서울운동장 야구장(지금의 동대문구장)이 이런 방식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그런 쌍팔년도
방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으나 나름 ’명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같다.

리글리구장은 메이저리그 구장 중 마지막으로 조명등을 설치하여 1988년이 되어서야 야간경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낮 경기를 가장 많이 하는 구장이라고 한다. 경기가 끝난 후 “W” 나 “L”이라고
쓴 깃발을 거는 전통도 유명하다. 시카고컵스의 승리나 혹은 패배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외야펜스가 담쟁이로 둘러싸인 것도 특이하다.

높이가 낮은 외야 밖으로 지붕이 솟은 건물들은 옥상과 꼭대기 층에 좌석을 만들어 관중을 유치하고 있었다.
저마다 홈페이지까지(
www.wrigleyfieldrooftop.com, www.wrigleyview.com 등) 갖고 있어 나중에 확인해보니
좌석뿐만 아니라 음식까지 제공하는 만만치 않은 비즈니스였다. 시카고컵스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리글리필드는 또 박찬호 선수와 인연이 각별한 곳이다. 1997년 4월 박찬호 메이저리그 첫 승을 이곳에서
올렸다. 메이저리그의 1승은 축구로 치면 월드컵 1승과 동일하다며 흥분하던 당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경기가 시작되면서 꾸물거리던 날씨가 기어코 가느다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다행이 뒤쪽 지붕 밑 좌석이 비어 우리는 그리로 자리를 옮겨 비를 맞지 않고 경기를 볼 수 있었다.
리그 상위권인 카디널스와의 경기는 8회까지 4:2로 카디널스의 우세로 진행 되었다. 아내와 나는
9회를 앞두고 컵스의 패배를 예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락가락하는 비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기차역까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기념품점에서 들렀다가 구장 밖으로 나오는데 관중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일었다.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 보니 9회말 투아웃 이후에 극적인 투런 홈런이 터져 동점이 된 것이다. 아내와 나는 ’
뭐야 이거?‘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국에 와서 이런 경험이 벌써 세 번째다.
매번 일찍 자리를 뜰 때마다 9회에 드라마가 만들어지며 상황이 역전되었던 것이다.
“역시 홈팀을 위해서 우리가 일찍 일어서야 해.”
우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공치사로 극적인 순간을 놓친 아쉬움을 달래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 호텔로 가기 전 기차에서 내려 MICHIGAN AVE에 있는 식당 THE PURPLE에서
저녁을 먹었다. 조리공간이 오픈되어 있는 이 식당은 혼잡하고 시끄러운 분위기가 특징이자
장점인 듯 했다. 예약을 받지 않는 이유를 알만도 했다.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돌아서려고 했으나 운 좋게 BAR쪽에 대기가 필요 없는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식당 이름에서 보듯 돼지 관련 요리가 많았다. 돼지꼬리 조림이나 돼지귀 튀김 같은 진기한 메뉴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먹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식당 근처 스타벅스로 들어가 잠시 비를 그어 가기로 했다. 창밖으로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도로 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겨울로 종종 걸음을 치는 것 같았다.
감싸 쥔 손안의 커피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비는 커피를 다 마시도록 잦아들지 않았다.
우리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비오는 MICHIGAN AVE, BRIDGE를 건너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내다본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아내는 책을 읽었고, 나는 풀리지 않는 스도쿠와 끙끙거리며 씨름을 했다.

(20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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