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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두 가지의 '감자' 따라하기

by 장돌뱅이. 2013. 9. 16.

어릴 적 우리 집도 다른 이웃처럼 감자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감자와 관련되어 밭에서 일을 한 
기억이 내겐 하나도 없다. 그 시절 감자와 관련된 유일한 기억은 비오는 날 포실포실하게 쪄낸 
감자를 접시에 담아 소금과 함께 내주시던 어머님의 모습뿐이다. 나는 소금대신 설탕으로 달라고
떼를 쓴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나의 고집을 못 이겨 설탕을 내 오시면서도
"감자는 소금이랑 먹어야 제 맛." 이라고 알려주시곤 하셨다.

감자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농사와 관련해서도 내겐 대개 먹을 거리와 관련된 기억일 뿐
노동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마 청소년기가 되기 이전에 집에서 농사를 그만 지은 이유도
있겠지만 같은 또래의 시골 출신 아이들이 나와 같은 어린 나이에 나름 자기 몫의 노동을 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부모님께서 어린 내게는 의도적으로 일절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노동은 분명 당사자들에게 고통이기도 했겠지만 생명의 보금자리인
땅과 
땀방울로 맺은 관계는 그러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깊이 있고 풍요로운 정서를
체득하는 기회도 되는 것 같다. 어설픈 책상물림(? 책상에 앉아 진득이 공부를 해
본 적도, 
특별히 이룬 것도 없으니 사실 이 단어도 적절치 못하다)으로  성인이 되어
내가 알고 있는
알량한 농사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는 대개 책을 통해 얻은 것들이었다.

공선옥이란 소설가가 쓴 『행복한 만찬』이라는 음식에 대한 산문집이 있다.

"제 입에 들어오는 음식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그저 '맛 있는 것'과
'몸에 좋은 것'만 찾는 세상 인심"이 얄미워서 썼다는 그 책에는 가난하지만 (어쩌면 가난했기에) 
먹을 거리에 더욱 진한 애정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감자"에 대한 글을 갈무리하여 옮겨 본다.

   감자씨는 대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월 말이나 삼월 초에 흙에 묻는다.
   겨우내 부엌 나무청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올망졸망 쭈글쭈글한 씨감자를
   씨눈을 보호해가며 반으로 가른다. 그런 날에는 춘설이라도 난분분 흩날리기가 십상이다.
   감자를 가르는 날은 저녁에 혹 가르고 남은 씨감자가 밥상 한 귀퉁이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렌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저녁 밥상머리에 내놓은, 겨우내 물이 빠져서
   쭈글쭈글한 씨감자 한 양재기, 밥풀 묻은 감자 한 양재기. 아이들은 저녁밥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감자 양재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럴 때 먹는 감자는 특유의 포근포근한 맛은 없다.
   대신 쫀득쫀득, 마치 약간 굳은 찹쌀떡 같은 맛이 난다.

   다음날 아침, 재에 버무린 씨감자를 아버지는 미리 두엄을 듬뿍 뿌려서 고랑을 내놓은 흙에 묻었다.
   씨감자는 심는다 하지 않고 그렇게 묻는다고 한다. 흙을 쏙쏙 파고 반으로 가는 씨감자를 한 쪽씩
   묻는 것이다. 그렇게 묻어두면 곡우가 지날 무렵에는 어느 새 싹이 터 있다. ()
   이윽고 온 천지에 찔레꽃 향기가 진동할 때쯤, 하루 종일 어디선가 뻐국새 소리 숨바꼭질할 때쯤,
   감자꽃이 피기 시작한다.
   (…) 감자꽃 필 때쯤 온 산야에는 노란 원추리꽃, 까만 점 박힌 참나리꽃이 피어난다. 온 세상에는
   꽃과 
초록의 향연이 마냥 싱그럽다. 이제 조금 있으면 보리도 익어가리라. 보리가 익어가고 감자
   뿌리에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감자알이 맺힐 것이다. 아, 햇보리에 감자밥, 한겨울 노란 서숙에
   고구마 넣은 
   밥을 해먹었듯이, 이제 보드라운 햇보리에 하얀 감자를 넣은 감자밥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초록의 숲속을 헤매다니며 뜯어온 푸른 고사리 무침에 뽀얀 취나물을 감자밥에
   비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채소가 그렇듯이 감자 또한 북을 주어야 한다. 튼튼한 열매를 맺히라고 뿌리 쪽에
   포실포실한 흙을 북돋아줘야 하는 것이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여자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간다. 아이들이 감자밭을 돌보는 동안 어른들은 고추 모종도
   내야하고 모내기 준비도 해야 한다. 보리가 까실까실 익어갈 때쯤, 아니 온 들에 보리타작을
   하고 남은 보리 가시랭이 태우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질 때쯤 감자도 튼실하게 굵어간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들에서 돌아온 엄마가 문득 말씀하신다.
   "감자가 들었을라나 어쨌을라나, 내일은 학교 갔다 와서 감자 한 소쿠리 캐와봐라."
   바야흐로 모내기철이 다가와 품앗이꾼들 반찬을 할 만한가 어떤가 시험 삼아 캐와보라는 것이다.
   드디어, 감자 먹을 때가 돌아온 것이다. 학교 갔다 와서 소쿠리를 들고 득달같이 감자밭으로 간다.
   아직은 청청한 감잣대를 뽑아 던지고 나는 감자를 캔다. 그해의 첫 감자, 뽀얗게 살찐 감자가
   주렁주렁한다. 그 쭈글쭈글하던 감자가 어떻게그리도 잘 생기게 변신을 했는지, 흙이 부리는
   조홧속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아직 많이 캐서는 안 된다. 딱 먹을 만큼만 캐야 한다.
   () 가시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감자를 집에 가져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일단 소쿠리째로 물에 씻어서 돌확에 들들 문대야 한다. 그러면 껍질이 맨들맨들하게 벗겨진다.
   그것을 그냥 푹 찐다. 오리지널 찐 감자다. 김 설설 나는 찐 감자는 모내기하는 어른들의 훌륭한
   새참이다.
   엄마는 장에 가서 비린 것을 산온다. 주로 갈치다. 감자 넣고 조린 갈치조림은 단연 일철의
   논두렁에서 인기 만점의 반찬이다. 비린 것이 없으면 햇고사리 넣고 조려도 되고, 햇고추 넣고
   조려도 된다. 그냥 왕멸치 몇 개 넣고 조리기도 한다. 조그만 새끼감자에 마늘종을 놓고 물엿을
   조금 넣고 쫀득쫀득하게 조리면 도중에 다 먹어버릴 정도로 맛있다.

   감자는 모내기철이 얼추 끝나갈 무렵에 본격적으로 수확을 한다. (…)  감자꽃이 지고 푸르
   감잣대가 시들시들 녹아내릴 때쯤, 감잣대를 뽑고 감자를 캔다. 미리 많이 캐다 먹어버려서
   감자밭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다. 겨울 한철의 고구마가 그랬듯이 이제 감자는 여름 한철의
   식량이 되고 간식이 되어 줄 것이다.                                 


여물어가는 감자를 기다리는 인내와 때를 맞춰 감자를 보살펴주는 이야기가 훈훈하고 넉넉하다.

글을 여러 번 읽으며 감자를 심고 북을 주고 감잣대를 걷고 감자를 캐는 일을 상상 속에서 따라 해보았다.
천지에 진동하는 찔레꽃 향기, 뻐꾸기 울음소리, 노란 원추리꽃, 주황색 참나리꽃‥‥‥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감자를 영글게 하기 위해서만 와글와글 거리는 것 같았다.
사시사철 시장에 가면 언제든 감자를 손에 놓을 수 있는 우리 시대의 풍요가 뭔가가 빠진
궁핍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내가 한국에 가고 혼자 있으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감자가 조금 있다.
공선옥의 감자에 대한 글을 읽은 김에 이놈들로 무엇을 해볼까 생각을 해보다 인터넷을 뒤졌다. 
무수히 많은 요리 사이트에서 그 해답을 얻었다. 더 복잡한 감자요리가 있겠지만 내 실력으론 라면 끓이는
정도의 난이도를 벗어날 수 없다. 수준에
적합한 세 가지 감자요리를 골랐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따라했다.
혼자 있으면서 내가 먹기 위해 어떤 요리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는 것 이외에 음식을 만드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첫째, 감자볶음

뭐야? '감자볶음이 요리면 파리도 독수리다' 하시는 분도 있으리라.
그러나 현재의 내 실력으로 만만찮은 난이도의 요리이다.
후라이판에 기름을 사용하는 것이 내겐 여전히 부담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인터넷에서는 감자를 얇게 채 썰어 천일염을 넣은 물에 15분에서 30분 정도
담군 후
물기를 제거하고 볶으라고 했다.


둘째, 감자국

 멸치 다시마 육수에 감자를 넣고 끓이다가 국간장, 참치액, 다진 마늘, 대파,
청양고추, 홍고추를 넣고 끓이라고 했다.
대파는 집에 없어서 그냥 아내가 썰어놓은 쪽파를 넣었고
청양고추는 멕시코산 할라피뇨로 대신했다. 홍고추는 없어서 넣지 못했다.
육수와 감자의 부드러운 맛 속에 할라피뇨에서 나온 칼칼함이 스며있었다.

셋째, 소고기 감자국

소고기와 감자가 어울릴까? 하는 의문을 잠시 가졌지만 인터넷 요리 사이 운영자의 내공을 믿기로 했다.
소고기를 (멸치를 뺀) 다시마로만 우려낸 육수에 감자와 함께 넣고 끓여낸다.
다른 재료는 대체로 위 감자국과 비슷하다.
대파나 청양고추는 위에서처럼 쪽파와 할라피뇨로 대신했고
역시 홍고추는 없어서 넣지 못했다. 고깃국이지만 담백한 맛이었다.

내가 만든 음식들은 사진에서부터 요리 사이트의 사진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맛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도 내겐 대견한(?) 맛이다. 감자볶음을 뺀 나머지 두 가지 국은 아내에게도 보여주기 위해 양을
넉넉히 만들어 남은 것을 그릇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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