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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고구마 죽과 밥

by 장돌뱅이. 2013. 9. 28.

앞선 감자 관련 글에 인용한 공선옥 작가의 책 『행복한 만찬』을 읽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했다. 생각없이 대했던 흔한 먹을거리들에게서 작가는 가난한 지난 추억들을 더듬어 풍요의 시대가 놓쳐버린 어떤 절실한 가치들을 잔잔하게 복원해내고 있었다.
모든 음식은 추억으로 완성된다고 하던가.
아내에게도 읽기를 권했더니 나와 같았는지 단숨에 읽어 내렸다.
공선옥의 책에서 다시 고구마에 대한 글을 인용해 본다.

옛날에는 참 쌀을 아꼈다. 나 또한 쌀같이 귀한 것이 세상에는 없는 줄 알았다. 귀하고 귀한 것이 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쌀을 아껴 먹었다.(······) 오지단지 안에 쌀을 가득 담아 두고도 겨울이면 사람들은 언제나 하루 한 끼쯤은 고구마로 때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루 삼시 세끼를 모두 밥으로 먹으면, 무슨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겨울 점심때쯤 마을 골목 안에는 삶은 고구마 냄새가 자우룩이 퍼지곤 했던 것이다. (······) 초여름 어느 비 오는 날, 한참 모내기에 바쁘지만 그래도 한나절 짬을 낸 아낙들은 고구마 줄기를 바구니에 담아 이고 산밭으로 갔다. 고구마 순은 언제나 여자들이 심었다. 가위로 줄기를 잘라 땅에 묻으면 고구마 순은 처음에는 땅에 적응하느라 혹은 비실비실하고 혹은 누리끼리했다가 어느 날부턴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 아낙들은 고구마밭 김을 매고 북을 주었다. (······) 고구마는 추석 무렵이나 되어야 제법 튼실해지고 단맛도 배어들어서 추석에 많은 음식을 장만할 형편이 못 되는 집들은 끝물 옥수수와 첫물 고구마를 추석 음식으로 내어 놓기도 했다. (······) 첫물 고구마는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향기가 정말 달콤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첫물 고구마의 향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리고 맛은 또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 햅쌀, 햇밤, 햇대추가 그렇듯이, 햇고구마는 그냥 고구마가 아니라 거의 축복이다. 자연의 축복! (······) 엄마가 내놓을 때, 식구들은 그 음식들에 절로 경배를 드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추수가 끝나고 깊어가는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 식구들은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는 언제나 모든 가을걷이가 끝났을 때 거두기 마련이다. 어느 집도 다른 일을 제쳐두고 고구마부터 거두는 집은 없다. (······) 고구마를 거둘 때도 아버지들은 엄마와 아이들이 고구마를 다 캐놓았을 때 나타나기가 십상이다. 엄마와 아이들이 캐놓은 고구마를 아버지들은 커다란 바지게에다 가득 담아 져나른다. 집 안방에는 이미 커다란 고구마 뒤주를 만들어놓았다. 겨우내 쌀과 함께 두고두고 그 집의 양식이 되어줄 고구마가 뒤주 안에 가득 쌓일 때쯤, 동산에는 소슬한 밤하늘에 달아 떠 있고 브이(V) 자를 이룬 기러기 떼가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고구마와 함께 긴긴 겨울을 나게 되는 것이다.

아내와 가끔씩 간식으로 혹은 한 끼 식사로 대용하던 고구마가 몇 개 남아 있어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 끝에 고구마죽과 고구마밥을 해보았다.

먼저 고구마죽.
참고한 레시피에는 고구마와 양파, 쌀과 우유를 넣으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현재 집안에 있는 재료를 활용하는 것을 조리 원칙으로 삼고 있다. 없는 우유대신 약간의 잣을 사용하기로 하고 불린 쌀과 준비한 재료들과 함께 믹서기에 갈아 약한 불에 저어가며 죽을 끓였다.

고구마밥은 말 그대로 평소 짓는 현미밥에 고구마를 잘라 넣었다.
노란색과 달짝지근한 맛이 밥에도 스며 있었다.

고구마에는 변비에 효과적인 식물성 섬유와 비타민 C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장을 자극하고, 연동 운동을 도와 장 내 노폐물을 체외로 배출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기능이 어떤 음식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진 않는다. 아내와 나는 고구마는 그냥 고구마여서, 어릴 적 먹던 추억이 있어 먹는다.
공선옥은 '맛 있는 것'과 '몸에 좋은 것'만을 찾는 세상의 인심이 얄미워 위의 책을 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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