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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3

아내가 외출한 날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기왕이면 저녁까지 먹고 와. 저녁 준비 안 하게."현관문을 나서는 아내에게 농담을 던졌다.아내가 외출하고 나면 집 안이 갑자기 휑하게 넓어진다.약간의 해방감(?)과 함께 한가하다가 심심해진다.유튜브로 그레고리안성가를 들으며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는다.혼자 있으면 집중이 잘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내가 없으면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유튜브를 끄고 넷플릭스로 돌려도 시들하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일은 걷는 것이다. 집 근처 대학으로 나갔다. 날이 제법 쌀쌀했다.며칠 동안 푸근한 날씨에 찰랑이던 호수 표면엔 다시 살얼음이 잡혀 있었다. 윤슬은 얼음 위에서 반짝였다.졸업이 가까운 모양이다. 방학으로 조용한 교정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졸업생들의 사진과 함께 익살스.. 2025. 2. 19.
신경림 시인 별세 그가 떠났단다. 향년 88세.평이한 언어로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따사롭게 감싸주었던 그의 시들은 젊은 시절 이래 기억에 진하게 남아있다. 그의 시와 만난 첫 기억을 나는 오래전 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70년대 어느 날, 지금은 없어진 종로의 한 책방에서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나는 놀라운 시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생각해 온 시에 대한 통념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충격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때까지 내게 있어 시는 고등학교 자습서에 나오는, 지루한 해설이 붙어야만 비로소 이해가 되는 골치 아픈 '무엇'일뿐이었다.  늘 알듯 모를 듯한 수수께끼 같은 단어들 사이에서 주제어를 찾아야 했고, 음률과 색조에 느낌까지도.. 2024. 5. 22.
내가 읽은 쉬운 시 158 - 박용래의「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박용래의 「겨울밤」- 고향. 머지 않아 사라지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고향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근원적 모태로서의 포근함과 어느 날 가슴을 찌르며 되살아나는 추억과 회귀를 재촉하는 정서는 사라지고, 다만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만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제게 고향의 의미가 그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선산이나 친척들은 물론, 어릴 적 친구들도 모두 그곳을 떠나버려 명절이라고 해서 굳이 찾아갈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놀던 개천은 복개되어 차 다니는 대로가 되었고, 산은 허리.. 2020.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