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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신경림 시인 별세

by 장돌뱅이. 2024. 5. 22.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목계나루터에 있는 신경림 시비(2004년 4월에 찍음)

그가 떠났단다. 향년 88세.
평이한 언어로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따사롭게 감싸주었던 그의 시들은 젊은 시절 이래 기억에 진하게 남아있다. 그의 시와 만난 첫 기억을 나는 오래전 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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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어느 날, 지금은 없어진 종로의 한 책방에서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나는 놀라운 시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생각해 온 시에 대한 통념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충격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때까지 내게 있어 시는 고등학교 자습서에 나오는, 지루한 해설이 붙어야만 비로소 이해가 되는 골치 아픈 '무엇'일뿐이었다.  늘 알듯 모를 듯한 수수께끼 같은 단어들 사이에서 주제어를 찾아야 했고, 음률과 색조에 느낌까지도 자습서 내용을 외워두어야 답을 고를 수 있었던 국어 시험지 속의 고통스러운 '무엇' 말이다. (···) 그런데 그날 내게 다가온 시는 그 생경하고 고통스러운 단어의 조합이 아닌, 우리 고향의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를 지극히 일상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풀어쓴 것이어서 쉬우면서도 놀라웠다.
'이런 것도 시인가? (···) 서점에 서서  시집을 읽으면서 처음의 혼란스러운 듯한 느낌이 점차 어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따사로운 감정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시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그 시집이 바로 유명한 신경림의 『농무(農舞)』였다.
첫 장에는 「겨울밤」이란 시가 실려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 묵내기 화투를 치고 /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 펑펑 쏟아지는데 /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 올해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 연애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묵내기 화투나 치고 돼지나 먹이는 '별볼일없는' 이웃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시다. 어떤 상징적인 기교나 해설서에나 나오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시적 장치 없이 "거의 산문에 가까운 평면적인 진술을 하고 있음에도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미지들이 우리말의 가락에 빈틈없이 맞아 떨어"진다. 궁핍한 60년대 농촌의 삶에 지친 절망이 뼈저리게 느껴지지만 자꾸 읽다 보면 어두운 이면에 들어 있는  넉넉한  긍정과 흥취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그의 시가 지닌 가난하되 궁상떨지 않는 따뜻함과 밝음이 좋았다.

-졸저,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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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목청을 높일 수 있는 날 선 주제를 각지지 않은 언어로 다스릴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에서 격앙된 감정보다는 잔잔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시는 많지만 첫 시집『농무(農舞)』에서 두세 편을 더 골라 읽어본다.
산문처럼 풀어써도 느낌과 서사가 흐트러지지 않는 건 그의 시가 가진 장점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 모두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 호남의 가뭄 얘기 / 조합 빛 얘기 /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파장(罷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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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어떤 녀석은 / 서림이처럼 헤헤대지만 이까짓 /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농무(農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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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갈대」는 1956년 신경림 시인의 초기작이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산다는 건 가끔 '속으로 조용히 울기도 하는' 일이라는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었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니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면서.


그에게 감사하고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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