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춤동아리에 들고, MT를 가고, 술을 마시고, 배낭여행을 하며 별다르게 사회에 눈을 주는 일 없이(줄 틈 없이) 즐기듯 대학생활을 마쳤다.
그런 딸아이는 아직 사회 초년 시절이었던 봄, 그 일을 겪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딸아이는 덕수궁 앞 분향소가 철거될 때까지 매일 퇴근 후 그곳을 찾아가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 대해 질문을 시작했던 것 같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왜 비극적인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그와 측근이 뒷구멍으론 뇌물을 챙긴 파렴치한 일뿐이라고 온갖 언론이 보도를 하는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그를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가? 내가 살아온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인가? 내게 주어진 개인적 과제 - 공부를 하고 생업에 열심인 것만으로 세상은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등등.
노무현대통령의 장례를 따라 봉하마을까지 다녀온 뒤부터 딸아이는 역사와 사회과학 책을 읽고 강좌를 쫓아다니며 시민단체의 회원이 되었다.
손자저하를 돌봐주러 갔다가 딸아이의 책장에서 노무현대통령의 책 『진보의 미래』를 보았다.
노 대통령은 퇴임 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책, 우리 사회 공론의 수준을 높일 책'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참모진과 주변 학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물론 책은 완성되지 못했고 『진보의 미래』에는 거대담론을 시작하기 위한 노대통령의 개략적인 구상을 담은 짧은 메모만 남게 되었다. 패기만만하던 국회의원 시절부터 대통령 시절까지, 좌충우돌을 마다하지 않고 세상의 벽에 맞서던 그의 성공과 실패의 소중한 경험을 공유하려던 생각도 끝내 꿈으로 남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도, 촛불도, 정권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반독재 투쟁이 성공한 것은 국민이 생각하는 만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만, 막강한 돈의 지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이를 지혜롭게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정권이 바뀌어서 세상이 달라질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먼저 바꾸어서 정권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맞는 길인 것 같다.
- 『진보의 미래』 중에서 -
그렇다, 반드시 있다 세상의 지도에는, 아무도 가지 않은 거기에,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거기에, 진실의 땅은 있느니
- 유안진의 시, 「지도책 읽기」 중에서 -
꿈은 아무리 위대해도 꿈일 뿐 현실이 아니겠지만 한편으론 현실을 버티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오월광주'에서 노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5월은, '아무도 가지 않고 가본적 없는 진실'의 세상을 향한 꿈꾸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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