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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4

모래알 하나 토요일 오후 시청 앞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갔다. 매번 그렇듯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행진을 했다. 답답하고 화가 나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선 동병상련의 연대감으로 흥겨운 분위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집회가 다시 6년 전처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행진을 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허공에 주먹을 뻗으면서도 의문과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빠삐따(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따지지 말고)'라는 백수의 원칙(?)에 따라 머릿수 하나 더할 뿐. 시인 김남주는 '모래알 하나로 적의 성벽에/입히는 상처 그런 일 직은 일에/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는가. 집회에서 돌아와 오래된 책을 뒤져보았다. 두 시간 남짓한 시위도 아닌 집회에 참석한 것뿐이라 '칠.. 2024. 2. 18.
바로 그래서 부르는 "죽창가"! 얼마 전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낸 개인청구권 소송"에서 서울지방법원은 소송 각하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은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도 소멸되었다거나 국제사회가 일제 식민지배를 불법으로 보지 않고 있다' 등의 반인륜적이고 반국가적인 역사관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일본 외무성이나 일본 최고 재판소 견해에도 반하며 우리나라 친일인사나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들여온 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느니, (소를 인용할 경우) '대일관계·한미동맹이 훼손될 수 있다'느니 하여 재판부의 판결이 법조문에 근거한 객관적·양심적 행위가 아니라 판사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 충격과 분노가 가시기도 전에.. 2021. 7. 1.
내가 읽은 쉬운 시 149 - 감에 관한 시 두 편 경북 청도가 고향인 친구가 유명한 청도반시를 보내왔다. 받고 난 후 며칠을 밀봉한 상태로 후숙을 시켜 홍시로 먹었다. 친구는 올 유난히 병충해가 심해 감 상태가 별로라고 했지만 충분히 맛이 있었다. 감을 먹으며 아내와 학창 시절에 자주 읽던 오래된 시를 떠올렸다. 올해 외식 문화의 한 특징이 뉴트로(NEW-TRO:복고풍) 감성이라더니 시도 그런가? 김준태며 김남주, 오래간만에 빛바랜 시집을 뒤적여 보았다. (하긴 요란스럽고 수상한 이즈음의 시절이 아내와 내가 학창시절에 보던 풍경을 닮지 않았는가. '그 시절'을 머릿기름 바르 듯 미끈하게 지나온 자들의 한물간 삭발 코스프레라니!)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2019. 10. 20.
지난 국토여행기 1 - 남도의 땅끝으로 봄마중을 가다5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의 김남주 생가에는 그의 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찾은 날 방문객을 위해 대문을 열어놓은 채 인근 도시로 목포로 출타 중이었다. 우리는 주인 없는 텅 빈 집 안팎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생가 앞에 서 있는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집에서 우리 민족의 꿈을 가슴 가득히 담고 살다간 시인이 태어났다. 그 이름은 김남주. 시인은 1946년 10월 16일 아버지 김봉수씨와 어머니 문일님 여사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이었다. 196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뒤 검정고시를 통하여 전남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시 ‘잿더미’ 등 7편의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1977년 해남에서 정광훈, 홍영표, 윤기현 등과 만나 해남농민회.. 2012.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