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모래알 하나

by 장돌뱅이. 2024. 2. 18.

토요일 오후 시청 앞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갔다.
매번 그렇듯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행진을 했다. 
답답하고 화가 나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선 동병상련의 연대감으로 흥겨운 분위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집회가 다시 6년 전처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행진을 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허공에 주먹을 뻗으면서도 의문과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빠삐따(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따지지 말고)'라는 백수의 원칙(?)에 따라 머릿수 하나 더할 뿐.
시인 김남주는 '모래알 하나로 적의 성벽에/입히는 상처 그런 일 직은 일에/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는가. 


집회에서 돌아와 오래된 책을 뒤져보았다.
두 시간 남짓한 시위도 아닌 집회에 참석한 것뿐이라 '칠팔십 년대'식 정서를 적용하는 건 분명 고장이며 무리일 수 있겠다. 그래도 시대를 바라보는 마음만은 그때처럼 절절하다고 생각했다.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사회적인 실천을 할 때 얼굴 빛내고 이름낼 수 있는 그런 것은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귀찮고 까다로운 일을 해 보아라. 누구의 눈에도 뜨지 않고 눈에 띄더라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꾸준히 하라는 것. 큰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작은 일을 지속적으로 끈기 있게 해내라는 것.(···) 변혁운동은 밤하늘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불꽃놀이처럼 그렇게 즐거운 유희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극적인 사건도 아니라는 것. 변혁운동의 역사가 우리에게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바는 정작 해방투쟁이라는 건 역사의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비상한, 그야말로 비상한 인내와 끈기, 헌신과 자기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
- 김남주, 『편지』 중에서 -

찬란한 빛 속에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나도 빛을 원한다.
원하지만 어찌할 것이냐? 이 어둠을 어찌할 것이냐? 어쩔 수도 없다. 다만 늪과도 같은 밤의 어둠으로부터 영롱한 저 그리운 새벽을 향하여 헐떡거리며 기어나갈 뿐이다. 포복. 잠시도 쉬지 않는 피투성이의 포복.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행동의 시로.
진흙창에서만 피어나는 연꽃의 숨은 뜻. 고졸(古拙)의 세계. 투명한, 가없는 물의 자유의 높이. 그러나 그것은 끝없는 방황과 쉴 새 없는 개입, 좌절과 절망의 깊은 수렁을 통과해야만 얻어지는, 끝내 버림받으면서도 끝끝내 사랑하는 뜨겁고 끈덕진 열정에 의해서만 비로소 얻어지는 값비싼 고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에 대한, 모든 대상에 대한 사랑, 악몽도, 강신도, 행동도 모두 이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사랑의, 뜨거운 뜨거운 사랑의 불꽃 같은 사랑의 언어,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사랑의 상실, 대상에 대한 무관심, 그 권태야 말로 모든 우리들의 무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70년 12월 10일
- 김지하 시집『황토』후기 중 -

윤민석 노래 삽입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루기  (0) 2024.02.20
우리는 완전 '편파'다  (0) 2024.02.19
조선간장과 콩나물  (0) 2024.02.17
하늘아이들  (0) 2024.02.16
해피 발렌타인데이  (0) 2024.02.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