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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5

2월29일 처음 그림을 대했을 때, 창고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설명을 보니 시베리아로 실려가는 수송 열차 속 죄수들이라고 한다. 아마도 러시아의 차르(tsar)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실현시키려 했던 혁명가들일지도 모르겠다. 열차가 잠시 정차하는 동안 천진난만한 아이는 빵 조각을 비둘기에게 나눠주고 있고 죄수 가족과 동료인 듯한 사람들이 이를 보며 웃고 있다. 기차의 안쪽에 제모(制帽)를 쓴 사람은 죄수들과 동떨어져 시선을 반대편으로 둔 채 서 있다. 기울어가는 전제 정권의 말단 호송 책임자라도 되는 것일까? 죄수들의 분위기는 여유롭고 화기애애한 반면 검은 실루엣의 사내는 침울하고 외로운 독불장군처럼 보인다. 험난한 유형 생활을 떠나는 처지임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절망스럽거나 너무 비장하지 않다. .. 2024. 2. 29.
콩나물 아내가 쥐눈이콩으로 콩나물을 길렀다. 옛날처럼 시루가 있을 리 없으니 우유곽 밑바닥에 구멍을 내 사용했다. 그리고 까만 비닐 봉지를 씌워서 어두운 곳에 두었다가 하루에 몇 번씩 꺼내 물을 주었다. 밤중에도 잠에서 깨면 물을 주곤 했다. 콩나물의 용도 보다 키우는 일 자체를 재미있어 하는 듯했다. 6일 정도 아내의 보살핌을 받은 콩나물은 우유곽 몸통이 빵빵해질 정도로 몸을 불렸다. 키도 쑥쑥 자라서 위쪽으로도 수북하게 노란 머리는 내밀며 올라왔다. 작은 콩의 변신은 가히 '천지개벽'의 수준이었다. 아내표 콩나물은 마트에서 사는 것만큼 통통하지 않고 늘씬(홀쭉)했다. 아내와 나는 그것을 건강한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침과 북엇국의 맛도 더 나은 것 같았다.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 2020. 9. 6.
내가 읽은 쉬운 시 110 - 김승희의「새벽밥」 *위 사진 : 가지깨소스무침 *위 사진 : 감자채게맛살전 *위 사진 : 소고기두릅(아스파라거스)말이 *위 사진 : 나박김치 비가 오는 휴일. 창문과 베란다 문을 모두 열고 아내와 비오는 풍경을 오래 내려다 보았다. 집안 대청소를 했다. 그리고 EBS의 '최고의 요리비결'에 나온 몇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아내와 음식을 나누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음악을 들었다. 차분하고 편안한 하루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2019. 5. 20.
내가 읽은 쉬운 시 94 - 김승희의「향연, 잔치국수」중 어수룩하게 넓은 국수 막사발에 물에 삶아 찬물에 헹궈 소반에 건져놓은 하이얗게 사리 지은 국수를 양껏 담고 그 위에 금빛 해 같은 노오란 달걀 지단 채 썰어 올려놓고 하이얀 달걀 지단 따로 채 썰어 올려놓고 파아란 애호박, 주황빛 당근도 채 썰어 볶아 올려놓고 빠알간 실고추도 몇개 올려드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양은 국자로 잘 우려낸 따스한 멸치장국을 양껏 부어 양념장을 곁들여내면 헤어진 것들이 국물 안에서 만나는 그리운 환호성, 반갑고 반갑다는 축하의 아우성. 금방 어우러지는 사랑의 놀라움, 노오란 지단은 더 노랗고 새파란 애호박은 더 새파랗고 빠알간 실고추는 더 빠알갛고 따스한 멸치장국, 아픈 자, 배고픈 자, 추운 자, 지친 자 찬란한 채색 고명과 어울려 한사발 기쁘게 모두 모두 잔치국수 한사발 두 .. 2019. 3. 31.
내가 읽은 쉬운 시 75 - 김승희의「가슴」 TSTORY에서 지난 한 해 내가 이곳 "장돌뱅이와 곱단이의 살아가는 이야기"에 글을 쓰면서 자주 사용한 단어들을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우리, 여행, 사람, 중국, 식당, 음식, 아내, 딸아이, 생각, 바다, 해변, 태국, 그들, 출장......" 우리가 뱉은 말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우주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인다고 했다. 내가 사용한 글 속의 단어들도 인터넷 공간 속에서만이 아니라 그곳에 같이 모여 있으리라 믿는다. 두터운 무게로 쌓인 그것들은 우리의 다음 말을 만들어 내고 또 삶을 규정할 것이다. 예쁘고 따뜻한 말 몇 개만으로 비록 잠시일지언정 '새로운 가슴'이 맥박칠 때가 있다. 일테면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윤동주의 시구절처럼. "어머님,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2018.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