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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94 - 김승희의「향연, 잔치국수」중

by 장돌뱅이. 2019. 3. 31.






어수룩하게 넓은 국수 막사발에

물에 삶아 찬물에 헹궈 소반에 건져놓은
하이얗게 사리 지은 국수를 양껏 담고
그 위에 금빛 해 같은
노오란 달걀 지단 채 썰어 올려놓고
하이얀 달걀 지단 따로 채 썰어 올려놓고
파아란 애호박, 주황빛 당근도 채 썰어 볶아 올려놓고
빠알간 실고추도 몇개 올려드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양은 국자로
잘 우려낸 따스한 멸치장국을 양껏 부어 양념장을 곁들여내면
헤어진 것들이 국물 안에서 만나는 그리운 환호성,
반갑고 반갑다는 축하의 아우성.
금방 어우러지는 사랑의 놀라움,
노오란 지단은 더 노랗고
새파란 애호박은 더 새파랗고
빠알간 실고추는 더 빠알갛고

따스한 멸치장국,
아픈 자, 배고픈 자, 추운 자, 지친 자
찬란한 채색 고명과 어울려
한사발 기쁘게
모두 모두 잔치국수 한사발 두 손으로 들어올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사랑 가운데,
화려한 한 그릇의 사랑 그 가운데로 오시는 분
마침내 우리 앞에도 놓이는 잔치 국수 한 사발


외출한 아내의 귀가 시간에 맞춰 잔치국수와 봄동겉절이 준비를 시작했다.
우둔으로 육수를 내고 고기는 건져 식힌 후 채를 썰었다. 돌려깍기를 한 애호박으론 채를 썰어 볶았다.
볶기 전에 약간의 소금에 10분 정도 절였다. 달걀은 흰색와 노른자를 분리하여 지단을 부쳤다.
노른자 지단은 비교적 만들기 쉬우나 흰색 지단은 내 실력으로 여전히 어려워 이번에도 완벽하게 만들진 못했다.
국수를 삶는 것을 빼곤 잔치국수 준비가 끝났다. 아내가 들어오면 바로 삶기로 했다.
아내가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는 사이면 탱탱해진 면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엔 봄동겉저리를 만들었다.
봄동은 "봄똥!"이라고 발음한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자라 일부 지방에서는 납작배추, 납딱배추, 딱갈배추,
떡배추 등으로도 불린다지만 '봄똥'이 가장 어울린다. 발음을 하면 입술이 동그래진다.
'똥'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거부감 없이 들리기는 쉽지 않다. 손자친구의 통통한 볼살처럼 앙증맞은 느낌이 든다.

고춧가루와 올리고당, 다진마늘, 간장, 설탕, 멸치액젖, 매실청 등으로 양념을 만들어 손질해 놓은 봄동과 무쳤다.

혼자 있으면 밥을 잘 해먹지 않게 된다.
밖에서 한끼 사먹어버리거나 라면을 끓여 대충 한끼를 때우게 된다.
요즈음은 '혼밥'이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밥은 원래 둘러앉아 도란도란 먹는 것이고 나누어 먹는 것이다.
식구(食口)는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식사를 준비할 때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흡족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아내는 슴슴한 간에 담백한 맛의 음식을 좋아한다. 잔치국수가 그중 한가지다. 
거기에 매콤달콤하고 고소한 봄동겉절이라니! 찰떡궁합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마주 앉아 맛난 음식을 나누는 시간엔 따뜻한 기운이 녹아나온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고민들은 저만치 물러나 작아진다.
"헤어진 것들이 국물 안에서 만나는 그리운 환호성,
반갑고 반갑다는 축하의 아우성.
금방 어우러지는 사랑의 놀라움."

- 삶에 욕심낼 일이 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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