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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95 - 이상국의「국수가 먹고 싶다」

by 장돌뱅이. 2019. 4. 6.


아파트 화단에 벚꽃이 절정인 봄날이지만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탁한 막걸리 빛 구름이 하루종일 하늘에 드리워 있다. 늦은 오후엔 비소식도 있나 보다.
이런 날은 부침개나 따끈하게 국물이 있는 국수가 제격이다.
마침 어제 노노스쿨에서 "칼국수"와 "달래 새우전"을 배웠으니 더할 나위 없이 딱이다.

배운 순서에 따라 밀가루를 집어들다 문득 드는 생각, '아! 우리집에는 홍두깨가 없지!' 
어제는 밀가루 반죽을 하여 숙성을 시켰다가 홍두깨로 직접 밀어 칼국수를 만드는 제대로 된 과정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없는' 사정이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마트에서 생면을 사왔다.

홍두깨는 흔히 칼국수나 만두를 만들 때 쓰는 동그란 막대기만을 생각하지만
원래 홍두깨는 "다듬잇감을 감아서 다듬이질할 때에 쓰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도구"를 말한다.
실제로 어린 시절 어머니는 다듬이 방망이로 밀가루 반죽을 밀었다.
한걸음 더 나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에는 옛 여성들의 삶의 슬픈 내력이 스며 있기도 하다.

아무튼 밀가루 반죽과 숙성과 썰기의 과정이 생략되니 일이 반으로 줄었다.
사실 어제 조리 실습 때 반죽이 제대로 안 되어 은근한 부담이 있던 차에 잘 된 일이다싶기도 했다.
집에 홍두깨가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동안 칼국수는 집에서 해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잔치국수나 비빔국수, 혹은 수제비는 집에서 해먹었어도 홍두깨가 필요한 칼국수만큼은
그 번거로움 때문인지 외식으로 해
왔던 것 같다.

서울엔 이름난 칼국수집들이 많다. 
아내와 함께 칼국수나 국수를 먹으러 다닌 흔적이 이 블로그에도 제법 있다.
서울의 수많은 국수집 중에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곳은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국시집"이다.
대학로에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날이면 자주 들리게 되는 곳이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873

멸치육수를 내고 호박과 표고버섯을 채썰어 볶아 고명을 준비했다.
호박 돌려깎기는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호박의 살이 비교적 무른 덕이다. 오이는 아직 서툴다.
어제 수업에는 없었지만 달걀 지단도 연습겸 다시 만들어 보았다.
노른 지단은 무난했으나 흰 지단은 여전히 합격점을 줄 수 없었다.
후라이판에 흰자를 투입했을 때 치익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하는 적절한 온도 조절과
흰자가 굳기 전에 한지처럼 얇고 고르게 펴는 레벨링 작업이 원활하지 못했다.
혼자 투덜거리다 문득 내가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을 조리선생님의 솜씨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햇병아리가 이만하면 성공! 다음번엔 더 낫게 만들자!"

"달래 새우전"은 달래 손질이 성가셔서 그렇지 만들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손질한 달래를 똬리처럼 꼬아서 동그랗게 만들고 가운데에 새우 하나씩을 박아 전을 부쳤다.
나중에 전을 먹으며 아내는 달래 향이 느껴진다고 좋아했다. 

조리 선생님은 달걀 지단이나 호박채를 절일 때 소금을  '한 꼬집 넣고'라고 표현한다.
'한 꼬집' - '소금을 조금 넣고'라는 애매한 표현보다 간결하고 귀여운데다 계량의 정도를 가늠하는 데도 편리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아직 등재된 단어는 아니었다.   
등재되지 않았다고 반드시 틀린 말은 아니다. 표준은 기준을 제시할 뿐이다.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전은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이므로 이런 말은 요리를 떠나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픈사전에는 "꼬집"이란 단어가 올라있고 뜻은 "소금이나 설탕 따위의 양념을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모아서 그 끝으로 집을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라고 나와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그대로 놓은 채로 식탁에서 아내와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두서없이 자잘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한방에 통하는 화통한 거대 담론이 아니라
무의미할 수도 있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나눔이 모여 든든한 소통과 신뢰를 이룬다고 아내와 나는 믿는다.
세상의 번잡하고 비루한 일들을 밀어내는 휴일 낮의 한가로운 해찰이 감미로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몸은 자꾸 의자 깊숙히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의 만족감에서 시작된 충만하고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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