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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7

봄 소식 점심 무렵, 집 근처 초등학교 앞이 부산하다.올봄 막 입학한 햇병아리들이 운동장을 달려 나와 교문에서 기다리는 엄마들 품에 안기며 만드는 생동감이다. 하나하나가 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 손자 같다.대학교 교정에는 신입생들을 뽑는 동아리들의 천막들로 장사진이다. 하릴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나도 하나 들어볼까?" 아내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 박남준,「봄 편지」-어제는 눈비에 바람이더니 오늘은 시치미를 떼듯 화창하다.게다가 경칩이다.블로그에 '경칩'을 검색하니 몇 개의 지난 글이 뜬다. 그중 하나가 헌법재판소라는, 일상 속에.. 2025. 3. 5.
아내가 외출한 날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기왕이면 저녁까지 먹고 와. 저녁 준비 안 하게."현관문을 나서는 아내에게 농담을 던졌다.아내가 외출하고 나면 집 안이 갑자기 휑하게 넓어진다.약간의 해방감(?)과 함께 한가하다가 심심해진다.유튜브로 그레고리안성가를 들으며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는다.혼자 있으면 집중이 잘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내가 없으면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유튜브를 끄고 넷플릭스로 돌려도 시들하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일은 걷는 것이다. 집 근처 대학으로 나갔다. 날이 제법 쌀쌀했다.며칠 동안 푸근한 날씨에 찰랑이던 호수 표면엔 다시 살얼음이 잡혀 있었다. 윤슬은 얼음 위에서 반짝였다.졸업이 가까운 모양이다. 방학으로 조용한 교정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졸업생들의 사진과 함께 익살스.. 2025. 2. 19.
그렇게 나이를 먹고 싶다 무를 깎아 먹는다 희디흰 무쪽 한입 베어먹으면 이제 잇몸도 무른 것인가 붉은 피 한 점 선연히도 찍혔다 속이 쓰리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끝을 보고서야 아랫배를 쓸어내린다 문득 이것들 다 옛날 그 겨울밤 다름아닌 그대로다 이렇게도 따라가며 닮아가는가흑백사진처럼 유년을 더듬는 겨울밤 추억은 문풍지처럼 흔들리며 아련하다- 박남준,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연말이면 이런저런 송년회에서 만나는 과거는 종종 가공의 영역에서 이상화되거나 과장, 왜곡되기 일쑤다. 그것은 힘든 현실에서 도피는 될 수 있지만 치유의 힘이 되지는 못한다.술이 깨고 나면 멀리 간만큼  다시 돌아와야 하는 피로만 남는다.추억이 힘을 갖고 위로가 되는 건 '그대로'의 지난날과 '그대로'의 현실을 서로 나누며 공감할 때뿐이다.그렇게 나이를 먹고.. 2024. 12. 27.
강가에 서서 노을은 햇빛과 하늘과 공기의 관계가 만들어낸다.서로를 변화시키고 스스로도 변화한 결과다.강가에 서서 서쪽 하늘과 강물에 비친 노을 보며 내가 지닌 관계의 그물망을 생각해 본다.돌도 오래 되면 품안이 너그러워진다는데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는 자타 공인의 늙은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작은 풀씨만 한 일에도 쉽게 너그러워지지 못하는 나의 옹졸함에 대해서도.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흐르고 흘렀던가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2024. 11. 12.
이름 부르는 일 여행에서 돌아와 서둘러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작은 친구는 발을 동동 구르며 격렬하게 좋아했고, 그 모습을 본 큰 친구는 자못 어른스럽게 말을 했다. "아주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잠에서 깨자마자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어린 강아지 같은 얼굴로 내게 안기는 작은 친구와, 도미노(Domino)나 우노(Uno) 등 작은 친구가 함께 할 수 없는 놀이를 기대하는 큰 친구 사이를 오고 가며 일박이일을 지치도록 놀았다. 사실 여행의 거의 모든 순간과 모든 대상에 아내와 나는 친구들을 대입시키고 평가했다. "이 옷이 친구들에게 어울릴까?" "이 음식은 친구들도 좋아하겠다." "친구가 망고를 무척 잘 먹었는데······ 두리안도 먹을 수 있을까?" "여기 수영장은 친구들이 놀기에 좀 깊다. 친구들과는 유아풀에 .. 2023. 4. 27.
내일부턴 낮이 길어진다 동짓날이다."팥죽 해 먹을까?"나의 말에 아내는 올해는 애동지라서 팥죽 대신에 팥떡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검색을 해보았다.동지가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12월 21일 오늘은 음력으로 11월 7일이라 애동지가 된다.중동지와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지만,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팥떡을 먹는다.애동지에 팥죽을 먹으면 아이들이 병에 잘 걸리고 나쁜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동네 단골 떡집에 갔더니 팥시루떡이 다 팔려 추가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애동지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겨울이 한참 남았지만, 동지는 겨울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기분을 느끼게 한다.1년 중 밤이 가장 길기 때문.. 2020. 12. 21.
내가 읽은 쉬운 시 20 - 박남준의「매미의 옛 몸」 여름이다. 덥다. 태풍과 장마 사이 잠시 맑은 하늘은 이른 아침부터 열기를 내뿜는다. 창문을 여니 올 첫 매미 소리가 맹렬하다. 몸부대끼는 출근길의 지하철 안이 또한 열기와 맹렬이다. 여름엔 여름처럼 살 일이다. 매미는 여전하다 아랑곳없이 울어대다니 하긴 그 얼마나 오랜 날들을 어두운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로 굼벵이로 살아왔던가 날개가 돋아나기까지의 오랜 시간을 생각한다 금선탈각(金蟬脫殼)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굼벵이의 몸을 벗고 날아오른 등이 찢긴 허물들 거기 바람이 머물 것이다 그 빈 몸속에 각질로 굳은 옛 매미의 몸속에 휘파람처럼 바람이 머물다 갈 것이다 날개처럼 며칠 남지 않은 저 시한부의 절규처럼 그 노래처럼 반짝이며 붙박여 있는 삶이 어쩌면 빈 껍질일지라도 그렇게 꼭 움켜쥐어야 하는 것이라는 듯 2014.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