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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4

제13차 범시민대행진 어릴 적 나는 '애국'이란 단어를 막연히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가치나 사랑 같은 거라고 상상했다. 일테면 반공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적군 탱크를 향해서 맨몸으로 돌진하는 육탄 용사의 용기나 적이 던진 수류탄을 끌어안고 산화하여 아군을 보호하는 희생처럼 거룩하거나 거대한 어떤 것.일상에서 '애국적' 감정이라고 내가 느꼈던 것은 킹스컵이나 메르데카 축구대회의 라디오 중계 때 '가슴에 태극 마크도 선명한 우리 선수들 어쩌고저쩌고' 하는 멘트를 들을 때뿐이었다. 조금 더 커서 근로, 납세, 국방, 교육이라는 국민의 4대 의무를 배울 때는 애국도 들어가 5대 의무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같다.애국. 나라사랑. 좋은 말이다. 누가 거기에 반대할 수 있으랴.그러나 나는 '애국'과 '국가'를 특별.. 2025. 3. 2.
너무도 자명하기에 층층의 바위 절벽이십리 해안을 돌아나가고칠산바다 파도쳐 일렁이는채석강 너럭바위 위에서칠십육년 전 이곳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해산 전수용을 생각한다산낙지 한마리에 소주를 비우며생사로서 있고 없는 것도 아니요성패로써 더하고 덜하는 것도 아니라던당신의 자명했던 의리와여기를 떠난 몇 달 후꽃잎으로 스러진당신의 단호했던 목숨을 생각한다너무도 자명했기에 더욱 단호했던당신의 싸움은망해버린 국가에 대한 만가였던가아니면 미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었던가예언으로 가는 길은 문득 끊겨험한 절벽을 이루고당신의 의리도 결국 바닷속에깊숙이 잠기고 말았던가납탄과 천보총 몇 자루에 의지해이곳 저곳 끈질긴 게릴라로 떠돌다가우연히 뱃길로 들른 당신의 의병 부대가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했던비단 무늬 채석강 바위 위에서웅얼거리는 거친 파도 .. 2025. 3. 1.
3·1절 105주년 일제 강점기 망령들의 무덤을 파내어 해괴한 분칠로 재활용을 하고, 독도를 국토에서 지우는가 하면, 식민지의 수탈과 폭력과 학살을 근대화로 왜곡하고, 횟집 수조의 물을 퍼마시며 후쿠시마 핵오염수를 괴담이라 윽박지르는 저들도 오늘 기념식 장에서는 독립, 민족, 조국, 통일같은 말을 입에 담을까? "저 왜적들은 조금 강성함을 믿고 기세가 교만하여 이웃 나라를 협박하는 것을 능사로 하며, 맹약(盟約) 파괴하는 것을 장기로 삼아 이웃의 의리와 각국의 공론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를 빼앗으려는 방자한 짓을 꺼리지 않습니다. ······마땅히 먼저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 나라 팔아넘긴 죄를 밝히고······" 1905년 을사늑약에 분노하여 면암 최익현이 쓴 「請討五賊疏(오적들을 처단할 것을 청하는 상.. 2024. 3. 1.
내가 읽은 쉬운 시 62 - 정희성의「불망기(不忘記)」 삼일절. '세 번도 더 부정'하고픈 해묵은 현실 속에 우리들의 꿈은 여전히 '압핀에 꽂혀'있다. 내일엔 또 다른 내일의 파도가 오겠지만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외치는 일이다. 만세! 만세! 만세! 내 조국은 식민지 일찍이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어쩌다 아비가 물려준 남루와 목숨뿐 나의 잠은 불편하다 나는 안다 우리들 잠 속의 포르말린 냄새를 잠들 수 없는 내 친구들의 죽음을 죽음 속의 꿈을 그런데 꿈에는 압핀이 꽂혀 있다 그렇다, 조국은 우리에게 노예를 가르쳤다 꿈의 노예를, 나는 안다 이 엄청난 신화를 뼈가 배반한 살, 살이 배반한 뼈를 뼈와 살 사이 이질적인 꿈 꿈의 전쟁, 그런데 우리는 갇혀 있다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 포르말린 냄새나는 꿈속 .. 2017.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