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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62 - 정희성의「불망기(不忘記)」

by 장돌뱅이. 2017. 3. 2.



삼일절.
'세 번도 더 부정'하고픈 해묵은 현실 속에
우리들의 꿈은 여전히 '압핀에 꽂혀'있다.
내일엔 또 다른 내일의 파도가 오겠지만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외치는 일이다.
만세!
만세!
만세!
 

내 조국은 식민지

일찍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어쩌다 아비가 물려준 남루와

목숨뿐

나의 잠은 불편하다

나는 안다 우리들 잠 속의 포르말린 냄새를

잠들 수 없는 내 친구들의 죽음을

죽음 속의 꿈을

그런데 꿈에는 압핀이 꽂혀 있다


그렇다, 조국은 우리에게 노예를 가르쳤다

꿈의 노예를,

나는 안다 이 엄청난 신화를

뼈가 배반한 살, 살이 배반한 뼈를

뼈와 살 사이

이질적인 꿈

꿈의 전쟁,

그런데 우리는 갇혀 있다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

포르말린 냄새나는 꿈속 깊이


사월에, 내 친구는 사살당했다

나는 기억한다 국민학교 시절

그가 책 읽던 소리,

그 죽은 지 십여년

책을 펴면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면

죽어서 자유로운 그의 목소리

그런데 여기엔 얼굴이 없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그런데

소리만 들린다

오 하느님, 하는 소리만
생각난다

어젯밤 붙잡혀간 시인의 넋두리,

그는 부정한다고 했다

세 번도 더,

조국의 관형사여

제 이름에 붙은 관형사

시인의 관이 무겁다고

머리를 떨구고

이제는 아름다운 말도 가락도 다 잊었다던

그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 무섭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땅이 무섭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땅에서 사는 내가 무섭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오, 기억하게 하라

우리들의 이름으로 불러보는

자유, 나의 조국아



*삼일절 저녁, 집회 시작 전부터 비가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말한 '함께 맞는 비' - 그때의 의미와는 좀 다르지만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았습니다.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향하던 행진 대열은 이전처럼  안국로타리까지 가지 못하고
경복궁 동십지각 근처에서 막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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