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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2

국물과 함께 한 오후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이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 보고 마시는.. 2021. 11. 24.
내가 읽은 쉬운 시 64 - 신달자의「여보! 비가 와요」 날이 새면 아내가 밤을 날아 귀국을 한다. 아내가 없는 사이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가 피었고 아파트 옆 학교의 양지바른 교정엔 흰 목련이 만발을 하였다. 아내는 분명 그 꽃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고 현관문을 들어오면서 우리만 누리는 행운인 양 감탄사와 함께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끊어졌던 일상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여보! 비가 와요." "하늘이 너무 고와요!"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우리를 살게 하는 그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을 위해서 세상엔 아직 증오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또한 기억하면서.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 2017.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