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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국물과 함께 한 오후

by 장돌뱅이. 2021. 11. 24.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이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 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 신달자, 「국물」-


아내와 한강과 서울숲을 걷고, 오래간만에 단골식당과 카페에서 한가롭고 나른한 오후를
보내려던 계획은 코로나 신규 환자가 4천 명이 넘어섰다는 소식에 움츠러들었다.

대신에 집에서 식사를 하고 걷기만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멸치와 야채를 넣고 육수를 내고 고기와 지단 등의 고명을 만들어 국수를 말았다.
텔레비전도 음악도 없이 젓가락으로 국수가락을 빨아들이는 소리만 있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해진' 이 나이에 까짓 코로나가 크게 겁나는 것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 우리 때문에 어린 손자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생길까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코로나를 이기거나 코로나와 원만한 '동거'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을 문득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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