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공항은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대부분 잉까의 매력을 따라 들고나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이용한 항공사는 LAN.
한 시간 정도를 날아 꾸스꼬에 도착했다.
해발 3천4백 미터의 고원도시.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꾸스꼬는
온통 붉은 기와지붕들로 모자이크 되어있었다. 공항 출구에 현지 여행사 여직원과 운전수가 서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번 여행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가이드가 동행하는 여행을 신청해 둔 터였다.
아침에 꾸스꼬에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려 혹시 비행기가 회항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10월 초는 비가 내리기는 아직 이른 편인데 의외의 날씨라고. 숙소까지 안내한 직원은
고산증 적응을 위해 오늘은 코카차를 많이 마시고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위 사진 : 리마 공항
호텔 로비에 코카차는 상시 준비되어 있었다.
고산증 예방 목적보다 우선 코카차의 맛이 궁금하여 한잔 따라 마셔보았다.
녹차에 약간의 설탕을 가미한 듯한 들척지근한 맛이 났다. 나쁘지 않았다.
*위 사진 : 코카잎
짐을 풀고 산책 겸 천천히 꾸스꼬 시내를 걸어보기로 했다.
뒷날 가이드와 함께 돌아볼 세부 ‘각론’의 여행에 앞서 개괄적인 ‘총론’을 학습하기로 한 것이다.
호텔을 나서 발길 닿는 대로 여기저기를 그냥 걸어 다녔다. 붉은 기와지붕의 처마가 낮게 드리운
도로의 폭은 좁았다. 일방통행의 좁은 골목길엔 한국의 티코(를 닮은) 차들이 쉬임 없이 지나갔다.
예전엔 티코가 실제로 많았다고 한다. 도로 주변엔 유명 관광지의 거리가 그렇듯 기념품점과 식당,
호텔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통복장을 하고 사진 모델이 되어주고 작은 팁을 받는 사람들도
곳곳에 서 있었다.
‘세계의 배꼽’을 뜻하는 꾸스꼬는 잉까제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현재 꾸스꼬에서 잉까의 수도다운 모습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 시대의 흔적은 빛바랜 건물의 축대나 식민지 시대에 지은 카톨릭 성당의
하부구조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전설의 황금 도시 엘도라도 EL DORADO 를 찾아 페루에 온 스페인 침략자들은
1533년 잉까제국을 멸망시키고 뒤이어 꾸스꼬를 철저히 파괴했다.
잉까의 신전은 뜯겨져 바로 그 자리에 새워지는 침략자들의 신을 모시는 신전의 자재로 쓰였다.
침략자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파괴와 약탈은 철저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신전은 더욱 화려하고
거대하게 지었을 것이다. 모든 과정에 잉까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을 것이다.
침략자들이 오기 전 600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은 불과 30년 만에 6분의 1로 줄어들었다.
침략자들이 옮겨온 전염병과 강제 노역이 원인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식민 지배의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를 갖다 붙이건 모든 식민 통치의 본질은 수탈과 폭력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방 반 세기가 훨씬 넘도록 일제의 강점이 한국 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식의
정신 나간 주장을 늘어놓는 일부 학자와 언론이 있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지난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역사가 어떠했는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식민지의 경제 지표가 숫자적으로 성장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침략통치국 경제 부문의 성장이며, 식민국으로서는 식민본국의 하부구조로 편입되어
숫자의 크기에 비례하여 종속이 깊어지고 기형화, 주변화의 정도도 커지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에 반비례 하여 작아지고 파산으로 가는 것은 민족경제일 뿐이다.
더군다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살해된 수백만의 한국인들을 위한 (통계조차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 2차대전 중 독일에 의해 살해된 유태인의 숫자를 웃도는 6백만?이상으로 추정)
한마디의 사과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세력들에게 분노와 함께 참담함을 느끼게 된다.
*건물의 하단구조에서나 볼 수 있는 옛 잉까의 흔적들.
가운데 사진은 잉까인들의 석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명한 "12각돌 PIEDRA DE DOCE ANGULOS"이다.
꾸스꼬의 중심은 아르마스 광장 PLAZA ARMAS 이다.
잉까시대에는 아우까이빠따 HAUCAYPATA로 불렸다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아르마스광장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광장에 서는 순간 가슴이 트이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넓은 광장엔 화단과 분수가 조성되어 있었고 고풍스런 갈색의 성당과 붉은 기와의
옛 건물들이 광장을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었다. 풍경에 스민 역사의 상처는 애처로운 것이었지만
광장의 한쪽 모퉁이 의자에 앉아서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의 시간은 그래도 한가로웠다.
광장 주변의 식당에서 페루 원주민들의 전통음식인 꾸이 CUY 를 맛보았다.
꾸이는 다른 말로 기니피그 GUINEA PIG나 실험용으로 쓰는 모르모트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애완동물로 인기가 있으나 이곳 원주민들은 이 동물을 집에서
식용으로 키운다고 한다. 원산지도 이름에 나와 있는 아프리카의 기니가 아니라
이곳 아메리카라고 한다.
보통 꾸이를 주문하면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접시에 담아 나온다고 하는데,
이날 내가 간 식당에서는 외국인 여행객을 위해 부분으로 잘라서 내왔다.
육질이 쫄깃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이틀 뒤 마추삐추를 가는 길에 한 민간인 집에서 키우는 기니피그 실물을 볼 수 있었다.
매우 작고 귀엽게 생긴 동물이었다. 아내는 저렇게 귀여운 동물을 어떻게 먹었느냐며
나에게 눈을 흘겼다.
인류학자인 마빈해리스 MARVIN HARRIS는 그의 책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는 인간의 음식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하며 각 지역의 인간은
이를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생태학적 조건 속에서 적응해왔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지역마다 그 지역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고기로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돼지고기를 안 먹거나 개고기를 먹는 것이 음식 문화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전통적인 엽기음식은 없다는 주장의 근거도 여기서 나온다.
꾸이도 그렇다.
다시 생각날 정도의 굉장한 맛은 아니지만 페루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세비체와 함께 한번쯤 경험해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겠다.
식사를 하는 도중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왔다.
70년대 미국의 가수 사이먼과 가펑클 SIMON & GARFUNKEL 이 부른 EL CONDOR PASA였다.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되고 싶고,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다’는 다소 헷갈리는 가사였지만
감미로운 곡조와 두 가수가 만들어내는 절묘한 화음이 매력적인 노래였다.
물론 페루에서는 들은 것은 노래가 아닌 연주곡이었다.
이후로 페루를 떠날 때까지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매우 자주 이 곡을 들을 수 있었다.
호텔이나 카페에서 걸핏하면 이 곡이 반복되었고 가이드가 틀어주는 라디오에서도 흘러나왔다.
서너 명의 악단이 식당이나 거리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모금을 하기도 했다.
나는 아예 이곡이 수록된 씨디를 사서 돌아와 미국에서 한동안 듣고 다녔다.
‘철새는 날아가고’로 알고 있던 EL CONDOR PASA는 직역을 하면 ‘독수리는 날아가고’ 란 뜻이다.
70년대의 번역자는 아마 힘과 권위의 상징인 독수리보다는 뭔가 낭만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철새가 부드러운 노래의 곡조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엘 꼰도르 빠사’도 제대로 옮긴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원래의 제목은 안데스 원주민 언어인 께추아 QUECHUA 말로 YAW KUNTUR
(와우 꾼뚜르=데려가주세요 꼰도르여)라는 뜻이라고.
‘와우 꾼뚜르에서 ’엘 꼰도르 빠사‘로’, 다시 ‘철새는 날아가고’로의 변화가
세상의 많은 모습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스페인의 잔혹한 식민 통치에 맞서 18세기에 대규모 농민항쟁을
이끌었다가 스페인에 의해 혀와 사지가 잘리는 잔혹한 죽음을 당한 페루의 꼰도르깐끼
JOSE GABRIEL CONDORCANQUI를 기린 (오페라의 테마) 음악이었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에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꼰도르깐끼는 식민지 억압으로부터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을 상징하는 페루(잉까)의 영웅이었다.
"내 영혼을 잉까의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는 의미가 담긴 원래의 노래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것과는 다른 음율과 내용을 지녔다.
곡조는 앞부분은 같지만 뒷부분으로 가면서 원곡은 느리고 슬픈 분위기에서
벗어나 빠르고 경쾌해진다. 특히 가사는 전혀 다르다.
원 가사는 장엄하고 비장함하다. 꼰도르는 때가 되면 오고가는 ‘철새’가 아니라
언제나 그곳에서 잉까인들을 영원불멸의 세계로 인도하는 하늘의 사자였던 것이다.
오! 하늘의 주인이신 위대하신 꼰도르여
나를 집으로 보내주세요, 안데스산 높은 곳으로,
오! 위대하신 꼰도르여,
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내 잉까의 형제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꼰도르여!
꾸스꼬의 광장에서 나를 기다려 주세요
우리 마추삐추와 와이나삐추를
함께 오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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