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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멕시코 및 중남미

마추삐추 가는 길3

by 장돌뱅이. 2014. 5. 6.

어제 저녁부터 은근하게 몸에 부담을 주던 어떤 기운이 밤을 지나면서 두통으로 옮겨갔다.
고산증의 시작인 듯 했다. 해안 지대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만에 급상승 시킨 고도에 몸이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심한 통증은 아니라 아직은(?) 견딜 만했다.
염려했던 아내는 오히려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였다. 물론 몸이 썩 가벼운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언젠가 고산증은 평소의 체력이나 운동량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아픈 것보다는 남자인 내가 아픈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로비에 앉아 코카차를 마시며 있으니 이번 우리의 여행을 안내할
운전기사와 가이드가 왔다. 가이드의 이름은 곤살로 GONZALO.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갈색 피부의, 자신의 표현대로 ‘잉까의 후예’인 사내였다.
그들의 안내로 꾸스꼬 탐방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숙소에서 가까운 꼬리깐차 QORIKANCKA 였다.
원래 꼬리깐차는 원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스페인 침략 후 바로 파괴되고 산또 도밍고 수도원 CONVENTO DE
SANTO DOMINGO 으로 개조되었다.

꼬리깐차의 본래 흔적은 수도원 건물의 하부를 지탱하고 있는 석축 구조물과 벽면뿐이다.
수도원 경내에서 볼 수 있는 옛 신전의 일부는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현재의 꼬리깐차,
아니 산또 도밍고는 태양신의 신전과 카톨릭 수도원의 두 가지가 뒤섞인 어정쩡한 모습이다.

가이드인 곤살로는 여행 안내서에도 많이 언급된 잉까의 자부심 - 침략자들이 세운 건물은
수차례 지진으로 크게 무너졌지만 잉까의 석축은 끄떡없었다는 -을 반복하여 강조했지만
그의 말에 긍정은 하면서도 좀 애잔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잉까인들은 자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는 지혜로웠지만 영악한 인간의 이기심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순수했던 것 같다.

꼬리깐차는 ‘황금 궁전’이란 뜻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이름에 걸맞게 벽은 황금판으로
덮였고 여러 개의 방에는 황금상들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황금이 건재할 것이라 상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잉까의 마지막 왕 아따우알빠 ATAHUALPHA는 카톨릭 사제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내던졌다는
이유로 체포당하여 자신이 갇힌 방의 손 높이만큼을 채울 수 있는 엄청난 황금을 바치고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가 성경책을 던지지 않았더라도 아마 결과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침략자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거룩한’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러
먼 바다를 건너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광장에서 본 꼬리깐차. 검은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원래의 석축이다.


*꼬리깐차를 허물고 들어선 또 도밍고 수도원

두 번째로 간 곳은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대성당 CATEDRAL DE CUSCO였다(아래 사진).
이곳 역시 잉까의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지었다고 한다. 어제는 광장에서 외부만 보았지만
오늘은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스페인 정복 직후에 시작하여 완공까지 100년이 걸렸다는
이 성당의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온갖 장식들로 가득했다.
금빛은빛으로 빛나는 제단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갖가지 그림, 조각 등은 조밀하게
성당 안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대성당 밖 왼쪽에는 대성당에 버금가는 웅장한 규모의 또 다른 성당(아래 사진),
헤수스 IGLESIA DE LA COMPAÑIA DE JESÚS가 있다.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역시 겉모습만으로도 그 내부의 화려함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원래 잉까의 궁전이었던 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원주민들의 삶, 유산과 신앙과 전통과 관습을 매장한 위에 들어선 서구인들의 신전......
그 시대 서구인들에게 예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보이는 것은 가장 낮은 자로 자처했던 예수의 사랑과 겸손이 아니라
안하무인의 절대적인 현실적 권위와 권력의 자취뿐이었다.
성당의 웅장함은 오만해 보였고 화려함은 잔인해 보였다.  

종교가 현실적인 권력에서 분리된 것은 분명 인류문명의 진화이다.
종교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현실을 직시하고
정직하고 거침없는 발언을 해야 하지만 현실의 권력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나아가 초월해야 한다.
황무지에서 고행의 길을 걸으면서도 악마의 현실적 유혹을 끝내 거부했던 예수의 당당함으로.

아르마스 광장을 떠나 꾸스꼬 북쪽 언덕 위에 있는 싹사이와망 SAQSAYWAMAN 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잉까인들이 스페인 침략자에 맞서 마지막 저항을 한 곳이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우습게 들리고 사실일까 의문도 가지만) 밤에는 싸우지 않는
잉까의 전통을 역이용해 밤에 침입한 스페인군들이 잉까인들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삭사이와망은 육즁한 바윗돌이 3층으로 쌓아 올려진 거대한 석벽이다.
원래는 4층이나 5층의 거대한 원형탑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곳이 정확히 무엇을 하던 곳일까는 아무도 모른다.
문자가 없던 잉까의 특성상 남아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꾸스꼬를 지키는 요새, 기념탑, 국가 창고라던가 하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이곳 역시 원형을 추측하거나 복원하기 힘들 정도로 침략자들이
성당이나 건물을 짓기 위해 돌들을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이다.

싹사이와망의 꼭대기에 오르니 꾸스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비행기에서 본대로 붉은 기와의 지붕들이 둘러싸인 산들에 담긴 듯 엎드려 있었다.
아늑하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침략과 전쟁, 멸망과 압제와 가난의 험한 세월도
다 녹여버릴 수 있을 것처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 옛날 남쪽 띠띠까까 호수에서 동족을 이끌고 이곳 꾸스꼬에 도착한
전설 속 잉까의 시조 망꼬까빡 MANCO CAPAC도 그런 느낌에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아닐까?

잉까제국의 전성기에 꾸스꼬는 남아메리카 밀림 속의 제왕 퓨마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고 한다.
(남아메리카 밀림에는 사자와 호랑이가 없다던가?) 싹사이와망은 퓨마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다.
가이드 곤살로씨가 보여준 지도에는 그 형상을 붉은 선으로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실제 육안으로 현재 꾸스꼬에서 퓨마의 형상을 읽어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세월은 변화와 함께 흘러간다.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들어온 종교는 이제 페루뿐만 아니라
남미 전역 대다수의 원주민들의 삶과 영혼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수백년 전의 원초적 역사에만 근거하여 판단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다하더라도 과거의 사실은 최소한 기억하여야 한다.
그것은 서로의 새로운 미래와 관계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아래 사진은 싹사이와망 바로 옆에 있는 껜꼬 KENKO 라는 잉까 시대 유적이다.
껜꼬 KENKO는 원주민 언어로 ‘미로’를 뜻한다. 미로로 이어진 이 동굴 속에서 제례를 지냈다고 한다.

짧은 오전 관광을 마치고 곤살로씨와 운전기사는 돌아갔다.
점심식사 자리에 초대를 했지만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다고 했다.
페루 전통음식점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아르마스 광장 옆 골목에 있는
DON TOMAS라는 식당 앞에 내려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옥수수로 만든 진한 자주색 전통 음료인 치차 모라다(CHICHA MORADA)와
알콜이 들어간 칵테일 삐스꼬 싸우어 PISCO SAUR를 곁들여 페루의 음식을 먹었다.
메뉴는 론리플래닛을 참고하고 곤잘로에게 물은 내용을 종합하여 선택하였다.

감자요리인 PAPA A LA HUANCAINA (POTATO BATHED IN A CREAMY CHEESE SAUCE),
YUCA CON OCOPA를 먹었다. 유까 YUCA는 아메리카 열대산 백합과 식물의 뿌리로
맛은 밤고구마와 비슷했다. 감자와 고구마를 좋아하는 아내는 두 가지 모두를 좋아했다.


*위 사진 : 치차와 그것을 만드는 재료인 옥수수. 위 사진속 치차는 옥수수로 발효시킨
              알코올이 들어간 치차이다. 
보통 음식점에선 무알코올의 치차를 내놓는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보다 좀 더 두통이 심해졌다.
호텔 로비에서 만난 한 서양인 할아버지가 고산증 치료제를 가지고 있는데 원하다면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을 했다. 할아버지는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약을 거부하는 건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했다. 나는 다만 저절로 적응이 될 때까지 내 몸으로 견뎌보고 싶었다.
코카차만 부지런히 마셔댔다.

저녁에 꾸쓰꼬 민속 예술센터에서 공연을 보았다. 화려한 민속의상을 입은 공연자들이
여러 가지 전통 민속춤을 보여주었다. 내겐 춤보다 페루인들이 쓰는 모자와 좀 깡동해 보이는
치마가 인상적이었다. 색상은 좀 다르지만 꾸스꼬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자와 치마였다.
페루사람들은 안데스의 험한 지형 속에 살면서 왜 (코믹해보이기까지 하는) 모자와 짧은 치마를
입게 된 것일까? 전통은 환경과의 타협일 터이니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위 사진 : 꾸스꼬 민속 에술센터 길 건너편에 후안로사로라는 화가가 1992년에 페루의 역사를 표현한 
              
대형 벽화가 있다. 잉까시대와 외세의 침략, 식민지와 해방 등을 그렸다. 
              20세기 초 멕시코에서 디에고 리베라 등에 의해 유행하였던 벽화운동의 영향이다.

잠자리에 들어 두통은 최고조에 달했다. 앞머리 쪽에 무거운 쇳덩이가 누르는 느낌이었다.
배게에 머리를 부벼대며 잠들었다 깨다를 반복했다. 아침이 되어 세수를 하고 나면서부터
머리 속이 맑아져 왔다. 이후로는 오는 날까지 두통은 재발 되지 않았다.
아내는 여행 내내 멀쩡하여 고마우면서도 신기했다.

뒷날 마추삐추로 향하는 차속에서 미소를 머금은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지대에 적응이 잘 되고 당신은 두통으로 시달린 이유를 알어?”

아내는 자신은 전생에 높은 곳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높은 지대에 적응이 쉬웠던 것이고
나는 아마 그때쯤 지상에서 아마 나무를 하러 다닌 나무꾼이었을 것이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뭐야 이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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