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스꼬를 떠나 마추삐추 바로 아래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AGUAS CALIENTES 까지
가는 날이다. 오얀따이땀보 OLLANTAYTAMBO까지는 승용차로 가고 오얀따이땀보에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까지는 기차를 타고 간다. 꾸스꼬에서 오얀따이땀보 사이는
“성스러운 계곡 VALLE SAGRADA ”이라 불리며 계곡 곳곳에 잉까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꾸스꼬를 빠져나오는 길가로 가난한 풍경이 이어졌다.
가파른 언덕 경사를 따라 허름한 집들이 조밀했다.
가냘프게 드러난 콘크리트 기둥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안데스 산맥의 높이가 지금도 계속 높아지고 있을 정도로 지각 움직임이
활발한 페루는 지진도 그만큼 많다는데......
운전기사와 가이드, 아내와 나, 네 명이 하는 여행은 편리한 점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다.
잉까 시절 황제의 궁전이 있었다는 마을 친체로 CHINCHERO 에 가까워 오면서
가이드 곤살로는 알빠까 ALAPCA 에 대한 설명을 자주 꺼냈다.
알빠까는 낙타과의 동물로 그 털이 고급 코트나 의료의 재료로 쓰인다.
그냥 털이나 털로 짠 직물도 모두 알빠까로 부른다. 꾸스꼬 시내에도 알빠까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 상점 몇 곳을 둘러보며 아내는 진짜 알빠까의 가격은 매우 비싼 편이라
일단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알빠까는 모두 ‘짝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곤살로는 이곳 친체로에 자신이 잘 아는 박물관(상점?)에서는 직접 알빠까를
기르고 제품을 만들어 가격이 좋다고 휴식도 취할 겸 들렀다가자고 강권을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냥 갈 길이나 가자고 하려고 했으나 아내는
그러지 말고 그냥 잠시 들렀다 가자고 했다. 어찌되었건 이 사람들 사는 방식 아니겠냐고.
하긴 끝내 거절을 하고 볼거리 한 곳을 더 본다한들 여행 내내 차안의 분위기가 좀 어색할
것도 같았다. 대형버스의 단체관광이라면 관계와 관심이 분산될 수 있겠으나 앞뒤 좌석에
앉아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는 단출한 4명의 여행은 그럴 여지가 없었다.
결국 아내는 곤살로가 안내한 ‘박물관’에서 목도리 등 몇 가지를 샀다.
알빠까의(?) 명성에 비하면 너무 싼 가격이고 게다가 가이드에게 돌아갈 커미션까지
포함되어 있을 터이니 얼마나 좋으냐며 아내는 밝게 웃었다.
상점 내에는 살아있는 알빠까를 서너 마리 매어두고 있었다. 크기는 일 미터가 채 안 되고
아담하고 순해 보이는 동물이었다. 알빠까는 안데스 산맥의 인디언들에 의해 길들여져
이제 야생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작업실이라기보다는 전시실에 가까웠지만
직물을 짜는 인디언 아낙네들의 모습도 상점의 한 편에서 볼 수 있었다.
곤살로는 꾸스꼬 시민의 70% 이상이 관광업에 종사를 한다고 했다.
통계에 저런 일꾼이나 길거리에서 사진 모델이 되어주고 팁을 받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제국의 과거가 화려했기에 곤살로를 포함한 후예들이 사는
고단한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머지 않아 친체로와 가까운 곳에 국제비행장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마추삐추에 더 많은 방문객을 모으기 위한 방책일 것이다. 그 거대한
사업이 누대에 걸쳐 이곳에 살아온 원주민들의 삶과 어떤 형태의 인연을 만들 것인가?
나의 경험으로는 곤살로의 기대감 넘친 미래와는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위사진 : 친체로의 알빠까 가게에서 본 꽃, 깐뚜 KANTU. 곤살로가 페루의 국화라고 알려주었다.
*위 사진 : 알빠까. 털은 의류 소재로 고기는 스테이크로 쓰이는, 페루인들에게 유용한 동물이다.
친체로를 벗어나 도로는 다시 황토색의 넓은 들판 사이로 이어졌다.
멀리 머리에 흰 눈을 인 안데스의 준봉들이 함께 달렸다. 창밖으로 가끔씩 사람들이 지나갔다.
농부가 소를 끌고 갔고 아낙이 양떼를 몰며 창가로 가깝게 스쳐갔다. 아낙은 머리에 예의 그 전통의
모자를 썼고 깡동한 치마를 입었다. 풀밭에 양 몇 마리를 풀어놓고 홀로 지키는 어린 아이도 있었다.
아이의 작은 체구가 들판을 상대적으로 더욱 넓고 크게 부각시켰다.
산과 들, 하늘과 구름뿐인 곳에 혼자 앉아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가 견디는 고요함과 무료함의 무게가 두텁게 느껴졌다.
그 아이에 대한 짠한 마음은 마을을 지날 때 만난 개구쟁이 녀석들의 호기심 어린
왁자지껄함으로 풀어지기도 했다. 가수 한대수가 노래한 “행복의 나라”에는
“벽에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가 있었음을 떠올려보았다.
모라이 MORAY는 커다란 동심원이 계단식으로 중첩된 거대한 웅덩이 모양었다.
크고 작은 동그란 웅덩이 두 개가 가깝게 있었다. 한 곳은 복원이 되었는지 깔끔한 원이었고
다른 한 곳은 그렇지 않았다.
아내와 곤살로를 남겨두고 혼자서 허름한 쪽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다.
(깔끔한 곳은 복원공사 관계로 바닥출입이 금지 되어 있었다.) 내려가서 위쪽을 올려다보니
생각보다 깊은 웅덩이였다. 모라이는 잉까인들의 밭이었다고 곤살로는 설명했다.
계단마다 다른 품종의 곡식을 심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나는 별로 믿어지지 않았다.
성스러운 계곡에 너른 들이 가득한데 구태여 이곳에 땅을 파고 돌 축대를 쌓는 수고를 해가며
농사지을 땅을 확보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외계인들이(?) 만든 미스테리 서클과도
같은 이곳은 정말 무엇을 하던 곳일까? 마추삐추를 포함한 많은 잉까의 유적들이 그런 질문을 하게 한다.
모라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염전 쌀리네라스 SALINERAS DE MARAS 있다.
염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작은 비닐 석영을 한 개씩 든 때 묻은 손을 내미는
아이들을 만났다. 가난한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마주치는 이런 상황 - 그리 잘 하는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들에게 페루 돈 몇 푼의 쏠(SOL)을 쥐어주고 사진을 찍었다. 이런 아이들과는
어떤 교감의 방법이 올바른 것일까 매번 난감해진다.
염전은 잉까시대부터(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한다. 땅속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오는
작은 수로로부터 염전은 시작되었다. 손으로 찍어 맛을 보니 ‘정말로’ 짠맛이 났다.
계곡 비탈밭은 눈이라도 내린 듯 온통 소금으로 하얗게 뒤엎여 있었다.
이 깊은 내륙의 산골에 소금을 준비해둔 자연과 그것을 찾아내고 개발한
인간의 노동이 만든 경이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우루밤바 URUBAMBA 시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기차를 타기 위해
오얀따이땀보 OLLANTAYTAMBO 로 갔다. 오얀따이땀보의 “땀보”는
원주민 언어인 께추아 QUECHUA 말로 “여관”이나 “역참”을 뜻한다.
전성기의 잉까제국은 남아메리카의 서부 전역, 남북으로 장장 4천 킬로미터에
달할 정도의 거대 제국이었다. 잉까는 ‘왕’을 의미하는 단어일 뿐이고 잉까제국의
공식 명칭은 ‘4방위 제국’ 즉 따완띤수유 TAHUANTINSUYO 였다. 공식 명칭에서 보듯
수도인 꾸스꼬에서 사방으로 촘촘하게 뻗어나간 도로망이 잉까가 광활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다. 따라서 제국 곳곳의 정보를 파악하고 중앙정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연락망은 필수였다고 하겠다. 땀보(역참)은 20킬로미터마다
있었고 차스끼라고 불리는 ‘파발꾼’들은 하루 200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다고 한다.
오얀따이땀보 마을은 가파르고 거대한 산과 잉까인들이 조성한 역시 거대한 유적 사이에
위치해있다. 유적은 신전인지, 군사적 요새인지 공물 창고인지 계단식 밭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인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가파른 계단을 땀을 흘리며 올라서면 일단 시원스런 풍경이 보답을 해준다는 사실과
험난한 지형에 거대한 바윗돌로 무엇인가를 세운 잉까인들에 대한 외경심이 느껴진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도대체 반반한 도구나 공구가 없던 시절에 맨손으로 이 거대한
돌덩어리들을 하필 이 가파른 곳까지 끌고오고, 다듬고, 세운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시대는 어떤 절실한 가치를 그들처럼 껴안고 사는 것일까?
정상에 앉아 땀을 훔치며 대답이 있을 리 없는 의문들을 떠올려 보았다.
*위 사진 : 끼뿌 QUIPU. 끼뿌는 문자가 없는 잉까 시대에 매듭과 색깔을 이용하여 인구, 가금류, 식량의
숫자를 기록하는데 이용했던 줄이다. 언어가 다른 부족 사이에도 이를 통해 소통을 했다고 한다.
원형에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치차를 파는 우루밤바의 한 술도가에서 찍었다.
오얀따이 땀보에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까지 가는 기차는 밝고 쾌적했다.
우루밤바강을 끼고 이어지는 절경을 잘 볼 수 있도록 유리창이 옆쪽만이
아니라 지붕 쪽에도 달려있었다.
맞은 편 좌석에는 미국에서 온 젊은 형제들이 앉아있었다.
형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이너리에서 일을 한다고 했고 동생은 뉴욕에서 온 의사라고 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붙임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루 전 나스까의 대형 지상화를 보고
왔다며 카메라 속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형은 동생보다 겁이 많았다. 우리 보고 절대 그곳에
가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지상화를 보기 위해 탄 경비행기의 곡예비행이 끔찍한 지옥이었다는 것이다.
공포감을 재현하는 그의 표현과 동작이 매우 익살스러웠다. 덕분에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내내 흥겨웠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의 기원은 모르겠지만 현재는 오직 마추삐추 덕분에 존재하는 마을인 것 같다.
‘뜨거운 물’이라는 이름의 뜻답게 가까운 곳에 온천도 있다고는 하지만 작은 마을은 뒷날 마추삐추를
오르려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업소와 음식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는 드디어
마추삐추의 발아래까지 왔다는 감격에 삐스꼬싸우어로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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