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인도네시아

지난 여행기 - 2000발리1

by 장돌뱅이. 2015. 2. 24.

여행 시기 : 2000년 7월
여행 지역 : 자카르타와 발리

원래 "아쿠아"란 여행사이트에 올렸던 여행기이다.

사이트가 폐쇄되어 이곳으로 옮긴다.

여행도 여행기도 오래 되어 정보로서 가치는 없어보이고고,  
지금의 생각과 다른 점도 눈에 띄지만 그대로 옮긴다.
여행이 남긴 당시의 감성과 기억은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자산이 아니겠는가.
우리 가족과 처제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한 여행기었다.

첨부한 사진은 글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여행 당시의 사진이 아니라 90년대 초반 우리 가족이 자카르타에 살 때 찍은 사진이다.

=============================================================================

1.'느리마 잉 빤둠'
해가 먼 하늘 끝으로 내려 가버린 저녁 6시 25분, 7시간의 비행 끝에 대한항공 627편은 자카르타의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에 내려앉았다.
적도 아래의 자카르타에서는 저녁 어스름이 짧다. 해가 지고 나면 바로 어둠이 몰려온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끌어질 때만 해도 쇠잔한 빛이 남아 주위를 분간할 수 있었는데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환한 미소로 다가오는 나의 인도네시아인 친구 J의 어깨 너머로 어느 새 어둠이 빽빽이 밀려와 있었다.

J는 십년 가까이 사귄 나의 인니 친구이다. 그는 원주민 혈통이 아니고 인도인과 아랍인의 피가 섞인 듯한 외모의
인니인이다. 그의 얼굴은 검은 색이지만 눈이 깊숙이 들어가고 코가 나온 것이 어찌 보면 중동인의 후손인 것 같고
어찌 보면 인도인의 후손인 것도 같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회교나 힌두교가 아닌 카톨릭이다.

그의 부인도 같은 종교를 갖고 있는 데 왜소한 체격에 순한 인상의 전통 인도네시아 여성의 외모를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나라답게 다양한 생김과 색깔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종교의 예외성(?)과 외모의
특이성을 고려할 때 그의 가족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복잡한 인도네시아의 역사의 한 부분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J는 자신의 선조가 언제 인도네시아에 왔는지 알지 못하며 언제부터 카톨릭을 믿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의 동생들은 모두 네델란드에 살고 있으며 그는 내년에 장남을 독일로 유학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다.

인니인들에게선 피식민지 국민으로서 자신을 지배하였던 국가나 민족에 대하여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것과
같은 격앙된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내가 만난 인니인들은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대부분 우리보다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자바인들의 전통적인 종교사상을 생각하면 일단 수긍이 되기도 한다.
'NRIMA ING PANDUM'(느리마 잉 빤둠). '신(神) 혹은 자연이 베푼대로(준대로) 받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연을 거역하며 개발과 개척에 힘을 쓰지 않으며,
통치자에 항거하여 더 좋은 사회건설을 위한 시도도 가장 작은 나라라고 한다.

인도네시아는 자살율이 가장 낮은 나라라는 것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혹자는 세계 식민지 역사상 독립투쟁 역시 가장 작은 나라였다고도 하는데 이런 식의 말은
자칫 한 나라의 역사와 자긍심을 멸시하는 표현이 될 수 있어 단정하기가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가 인니의 역사와 종교, 사상에 대하여 아는 것이 너무 없다.
몇 권의 책과 단 며칠 동안의 여행으로 이 나라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커다란 오만일 뿐이다.
인도네시아는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 400백만 년이란 영원의 시간이 2억의 인구에 스며 있는 곳 아닌가.
.

2. 따만 미니 인도네시아 TAMAN MINI INDONESIA INDAH
아침 일찍 J를 통해 예약해 두었던 8인승 차량과 운전수가 호텔 로비에 와 있었다.
우리 가족과 처제, 그리고 조카들을 대동하여 일행이 6명인지라 큰 차를 빌려야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값이 싼 게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운전수의 인건비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초 내가 자카르타에 살 때 우리 운전수는 월50불 가량을 주었던 것 같다.
운전수는 오버타임을 할 경우가 많으므로 평균 70불 정도 받아간 것 같다.

이런 공식적인 봉급은 (현지 파트너인 중국인) 회사에서 지급되는 것이었는데, 아내와 나는 사적으로
매달 얼마쯤의 별봉을 더 마련해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번 여행 기간 중 이틀동안 우리가
렌트한 차량의 운전수 M은 월70만(약 80불) 루피아의 봉급을 받고, 오버타임 근무시 시간당
오천 루피아의 수당과 하루 1만 루피아의 식대를 받고 있었다.(1 USD=8,600 루피아)
차량 렌트 비용은 기름과 운전수 비용을 포함하여 10시간 기준 350,000 루피아였다.


우리는 첫 번째 방문지인 '따만 미니'로 향했다. '따만 미니'는 TAMAN MINI INDONESIA INDAH의 준말로.
'아름다운 인도네시아의 작은 공원'이란 뜻이다.
호텔을 나서 잘 정돈된 고속도로를 달려 30여분 만에 우리는 '따만 미니'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우리를 태운 차가 눈에 익은 동상과 건물 등을 지날 때마다 아내와 딸아이는 탄성을 지르며
7년 전의 옛일을 회상하였다.
"아! 여기는 우리가 자주 환전하던 데다."
"저기 생각나? 왜 그 한국 음식점 있던데 말이야..."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학교와 함께 있던 한국 대사관 건물을 지날 때 그 탄성 소리는 가장 커졌다.
왜 안그러겠는가? 딸아이는 학교를 다니느라 아내는 인니어를 공부하느라 매일 다니던 곳인데.



'따만미니'는 일테면 인도네시아의 민속촌이다. 인니 27개 지방의 전통 가옥이 실제와 동일한 크기로 제작되어
지역 특산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워낙 큰 나라이고 섬나라이다 보니 지역마다 각자의 환경에 맞게 집의 모양이 다르다.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삶의 지혜가 만들어 낸 다양성이 볼 만하다. 뒷 배경으로 삼아 사진을 찍어도 아름답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전시용이라 생명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 사람이 살고 있는
너와집이나 굴피집에서 느낄 수 있는 생활에 대한 오붓한 감정과 용인 민속촌의 잘 정돈되어 있지만 텅 빈 옛 집에서
느껴지는 황량함과는 차이가 크지 않던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박제된 동물과 같은 법이다.

공원의 크기는 '미니'가 아니라 100 헥타르(100만 평방미터)로 거대하다. 숫자로는 실감이 잘 안 나는 법이니
걸어서 전체를 구경하기에는 무척 힘드는 곳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낫겠다.
이 공원은 전 대통령 수하르토의 부인이
착안하여 2천6백만불이란 많은 공사비를 투자하여 1975년에 개장하였다. 이 곳에 살고 있던 많은 농민들을 강제 이주
시킨 뒤의 일이다.

공원 내에는 여러 박물관과 새공원등의 볼 거리가 있으며 휴일에는 민속 공연도 있다. 공원의 관리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나 예전에 우리 가족이 살 때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부실하지 않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경제 위기의 여파가 여기에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계륵(鷄肋)은 닭갈비란 말이지만 실제 의미는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먹을 것 없는 것을 일컫는다.
자카르타 여행에 있어서 '따만 미니' 자체는 아직 내게 그런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안가보자니 섭섭하고
막상 가서 보면 또 그저 그런 곳. 그러나 나는 누가 묻는다면 '강력추천'은 아니더라도 한번쯤 가보라고 권할 작정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곳은 다양한 형태의 집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니인들을 많이 만나게되는 기회이니까.

휴일이면 '따만미니'는 많은 인니인들로 혼잡하다. 여행자들은 때로 이런 혼잡함도 즐겨볼 필요가 있겠다.
눈빛을 마주치면 언제나 웃는 사람들의 얼굴이 순박하고 흔쾌이 사진도 함께 찍고 스스럼 없이 어울려 주는
인니인들의 정겨움이 좋다.
구경에 다리가 아프면 그늘진 가게의 돗자리에 앉아 야자 열매를 잘라 목을 축이며
먹을 것 싸 들고 나들이 나온 이런 인니인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는 것도
흥겨운 경험일 것이다.



3. 아름다운 야자수 마을의 푸른 보석 길
JL. PERMATA BIRU, KELAPA GADING PERMAI
(아름다운 노란 야자 마을의 푸른 보석 길)
내가 자카르타에 살 던 때의 우리 집 주소의 일부이다. 적어 놓고 보니 주소가 아니라 아름다운 동화나라에 나오는
시나 노래 구절 같다.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 큰 길가로 커다란 야자수들이 서있긴 하지만 언제나 푸른 색이고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평범한 시멘트 포장길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곳에서 살던 때의 옛 이야기는
언제나 보석처럼 아름답고 푸른 가을 하늘처럼 가슴 아련한 추억이 되어 다가온다. 
 



아내는 자카르타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깝게 지내던 우리집 가사 도우미 '까니 KANI'를 떠올리곤 마음 아파해 한다.
작은 키에 눈이 동그랗던 19살의 그 소녀. 매일 딸아이의 등하교와 아내의 장보기를 도와주던 운전수 '꼬디르 KODIR'.
모두들 경제위기가 닥친 지난 몇 년의 험한 세월동안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우리는 우리가 살던 옛집을 찾아가 보았다. 비록 골목 초입의 모양새가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한번도 멈칫거림
없이 옛집을 찾을 수 있었다. 작고 아담한 흰 색의 이층집. 우리 식구가 배드민턴을 치곤 하던 집 앞 골목.
해바라기를 키우던 작은 화단과 약간의 잔디밭. 왼쪽으로 창문 앞에 의자 두 개와 작은 탁자가 놓여있던
현관문을 열면 회색 빛 소파와 식탁이 보이고 딸아이가 좋아하던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면 천정에 매달린
커다란 선풍기 아래 텔레비전과 자주빛 소파가 있었지. 거기서 오른편으로 딸아이의 방이 보이고 왼편으론 돌아
들어가면 아내와 내가 사용하는 하얀색의 커텐이 있던 방이 있었고 딸아이는 종종 우리 부부와 함께 자겠다고 하여
우리는 자주 큰 방으로 딸아이의 침대를 옮겨 놓곤 했었다.
 



어느 일요일인가 나는 흰색의 벽이 너무 넓어 보여 딸아이의 방 벽면에 둘리와 재동이, 도우너, 스누피 등의 만화
주인공들을 그렸었고 좋아하던 딸아이의 어릴 적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혹시 들어가 볼 수 없을까하여
기대를 했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팔려고 내놓은 상태라고 이웃이 말해주었다. 그래도 바로 이웃에 딸아이의
친구 신디가 아직도 살고 있어 반가웠다.
딸아이와 신디는 그러니까 칠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서로의 어색함과
부끄러움 없어지기엔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이 너무 짧아 손을 잡고 사진 찍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던가? 나는 팔년전 딸아이와 신디가 노는 것을 보고
그 말을 긍정하게 되었다. 당시에 딸아이는 주위에 한국인 친구가 없어 하교 후에는 종종 심심해 하곤 하였다.

특히 일요일에는 더욱 그래서 하루는 이웃집에 사는 딸아이 또래인 신디를 그애의 동생과 함께 집으로 초청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어찌해보라는 심정으로 어색한 인사를 서로 시킨 후에 한 방에 넣었더니
이내 웃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디가 돌아간 후에 딸아이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며 놀았는지는 신기한 일이다.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옛집을 돌아나온 우리는 근처에 있는 SOGO 백화점이 붙어 있는 쇼핑 센터로 갔다. 역시 우리 가족의 발자국이
여러번 찍혀 있는 곳이다. 특별히 물건을 사지 않아도 백화점이며 쇼핑 센터에 꼭 눈도장을 찍어야하는
우리 딸아이의 습성은 이날은 조카아이까지 가세하여 두시간을 헤멘 끝에 편지지와 봉투 몇 장을 샀다.

이럴 때 나는 완전히 보디가드처럼 딸아이의 뒤를 쫓아 다녀야 한다. 아직 내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휴--우.
이 곳 일층에 있는 식품점에서 과일 몇가지를 산 우리는 옛날처럼 OTAK-OTAK이란 음식을 사먹었다. OTAK-OTAK은
어묵 종류를 바나나 껍질로 싸서 구운 것이다. 굉장히 맛이 있는 음식은 아니나 심심풀이 땅콩은 된다

'여행과 사진 > 인도네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난 여행기 - 2000발리3  (0) 2015.02.24
지난 여행기 - 2000발리2  (0) 2015.02.24
2015 첫 출장  (0) 2015.01.10
BOROBUDUR IN YOGJAKARTA  (0) 2014.05.16
AMANJIWO RESORT IN YOGJAKARTA  (0) 2014.05.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