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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가난한 사랑 노래

by 장돌뱅이. 2012. 4. 16.

 


*위 사진 : 미국과 국경 부근 황량한 산언덕에 들어선 멕시코 달동네.

“멕시코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공기부터 틀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국경선에 보이지 않는 공기차단막을 설치한 것 같다는 말을 하지요.”

영화 트래픽TRAFFIC에서 티후아나는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마약의 공급지로 시종
우울하게 그려져 있다. 영화는 티후아나를 늘 먼지같은 누런 색감으로 표현하여, 군부의 실세가
마약조직과 연관되어 있다는 줄거리가 아니어도, 느낌부터 절망스러워 보였다.
아침마다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들어서면 차창 밖으로 흐르던 이제까지의 초록은 별안간
잿빛으로 바뀐다. 메말라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역시 메말라 보이는 판잣집들이 줄지어 서있다.
갈라지고 패인 도로 주변엔 늘 한 두마리의 개들이 죽은 채로 방치되어 있다.
현지 직원의 말처럼 텅 빈 공간을 흐르는 공기마저 샌디에고와는 달리 희뿌해 보인다.

미국 땅 샌디에고 SAN DIEGO와 멕시코 땅 티후아나 TIJUANA는 그렇게 국경을 경계선으로
한 극단과 또 다른 극단의 모습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부와 가난.
초록과 회색.
싱싱함과 메마름.
투명함과 불투명함.

"게을러터진 놈들 같으니라구. 청소라도 좀 샌디에고처럼 깨끗이 해놓을 수 없나? 물도 뿌리구
잔디도 가꾸구 말이야.“

같이 출장을 간 M은 아침마다 멕시코를 들어서기만하면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산이 없는 것이겠지요.“
“예산? 까짓 놈의 빗자루질좀 하구 물좀 뿌리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 길거리에 빈둥빈둥 노는
놈들만 잡아다가 시켜두 충분하것다. 우리나라 국토건설단이나 삼청교육대처럼 마약이니 뭐니
하는 놈들 싸그리 잡아다 정신 번쩍나게 교육 시킨 다음 온 나라 청소를 시키면 되지.
마약사범 없어져서 좋구 나라가 깨끗해져서 좋구. 꿩 먹구 알 먹구지 뭐.“

멕시코 땅에만 들어서면 그는 무엇인가 걷잡을 수 없이 자신감이 생겨나는 듯 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을 다물고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꼭 그가 나의 상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그의 단순성이 무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말 무엇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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