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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4 - 남한산성

by 장돌뱅이. 2015. 5. 19.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은 약 8키로미터.
두 시간 반 쯤 걸렸다. 성벽을 따라가는 길이다보니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는 길이었다.
멀리 서울과 하남, 성남시가 보였다.



위 사진은 출발과 도착 지점이었던 남문(지화문, 至和門).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수어장대는 원래 산성에 있던 4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성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위 사진은 북문



위아래로, 오른쪽 왼쪽으로, 굽이치는 성벽.



남문으로 돌아와 성문 망루에서 내려다본 성밖 풍경.


*위 사진 : 삼전도비. 

남한산성은 부득불 병자호란을 떠올리게 된다.
청태종의 무릎 아래 조선의 왕 인조는 3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을 했다. 추운 겨울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여 두달 여를 버틴 끝의 일이다.
나라를 세운 이래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쇄락해가는 명나라와 강성한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의 실리외교를 추구했던 광해군을
인조반정으로 몰락시킨 집권세력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라는 명분을 고집했다.
청나라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사신은 외국 사절 중 유일하게 절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200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이고 은혜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아서 임진년(조일전쟁)에 우리를 구원한 은혜는 만년을 가도 잊을 수가 없다.
   먼저 임금은 임금 자리에 있던 40년 동안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겨 평생을 두고 황제가 계신 서쪽에 등을
   대고 앉은 적이 없다. 그런데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에 다른 마음을 품고는
   오랑캐에게 성의를 보였다.(...)예의있는 우리나라를 짐승 같은 오랑캐로 굴러떨어지게 했으니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아픈 일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인조 2년에 펴낸) "광해군 일기15" 중-

전쟁을 자초한 것이다. 청나라는 인조 14년 1636년 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음이 두꺼워진 압록강을 넘었다.
조정은 열이틀이나 지니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지만 청군은 벌써 개성을 지난 상황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던' 명나라에서 구원병은 없었다.
명분과 실리, 주전(主戰)과 주화(主和), 모두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다는 식의 해석은 망언일 뿐이다.
어느 주장이 더 백성의 안위에 근거하고 확보를 했느냐(할 수 있었느냐)의 기준으로 보면 명확해질 일이다.

청나라는 항복식을 치른 후 조선의 공력과 경비로 청 태종의 공적비를 세우라고 강요했다.
굴욕의 삼전도비는 잠실 석촌호수 입구 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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