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군산까지 2시간반. 생각보다 가까웠다.
아침을 거르고 이른 시간에 버스에 올랐더니 군산에 도착하자 빈속이 보내는 신호가 강렬했다.
'고픈 배는 악마의 운동장'이라고 하지 않던가.
월명동에 있는 식당, 일출옥은 군산 여행의 첫 방문지가 되었다.
콩나물 국밥과 아욱국, 두 가지만을 내는 곳이다.
아내와 나는 아욱국을 주문했다. 된장과 어울린 아욱이 은근하고 구수한 맛을 냈다.
배 속의 '악마'를 진정시키고 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군산 도보 탐방에 나섰다.
개략적인 경로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걷기로 했다.
'시간여행'이란 말은 군산시에서 만든 군산여행 안내서에 나온 말이다.
그 앞에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 도시 군산'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조그만 포구에 지나지 않았던 군산은 1899년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목포, 진남포에 이어
조선(대한제국)에서 일곱번째로 개항되어 일제가 수탈한 쌀을 실어내고 일본의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주요 항구가 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규모의 일본인들이 유입되었고 항구 주변의 기름진 들판은 신속하게 일본인 소유로 바뀌어 갔다.
1908년엔 군산 옥구 지방에 일본인들이 차지한 땅이 무려 이만 정보(1정보는 3천평)가 되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남승재가 말한 바 있다.
"대체 이 조그만 군산 바닥이 이러한 바이면 조선 전체는 어떠한 것인고".
'두집 건너 한집은 일본집'이라던가, 혹은 '일본의 민속촌'이라는 군산에 대한
자조적인 설명은 수탈과 눈물과 오욕의 역사의 다른 표현이며,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 도시' 란 수식어의 이면일 수 있겠다.
아무튼 여전히 군산에는 일본식 건물이 많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옛 건물은 물론이고 새로 지은(개보수를 한) 듯한 건물들도 일본풍이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주제로 한 군산항쟁관도 건물 자체는 일본식이었다.
1919년 호남지방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현장에 들어선 당시 주택을 리모델링 한 것이라고 한다.
동국사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라고 한다.
1909년 일본 조동종(曺洞宗)에서 세운 금강선사가 그 전신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높은 지붕에서 급격하게 내리긋는 지붕 물매가 우리의 전통 사찰과는 달라 보였다.
동국사 대웅전 앞마당 한쪽에는 종군위안부를 기리는 "군산평화의소녀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제 침략에 동조했던 일본 조동종의 "참회와 사죄의 글"을 새긴 비가 서 있었다.
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 우리는 과거 해외포교의 역사 속에서 범했던 중대한 과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아시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참회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과거 해외포교에
종사했던 사람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일본의 해외 침략에 박수 갈채를 보내고 그것을 정당화했던 종문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 특히 한반도에서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범했으며 조선을 종속
시키려했고 결국 한국을 강점함으로써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 버렸는데,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침범 당하거나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든 민족이든 마찬가지이다.(...) 제 아무리 완벽한 이론으로 무장해 나타나더라도 어떤 하나의 사상 혹은
신앙이 다른 존재의 존엄성을 침해하거나 다른 존재와의 공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사상과 신앙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사상이나 신앙을 초월해 훨씬
엄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
요사이 일본 정치지도자에게 읽어주고 싶은 글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모습도 이 글에 비추어보고 싶다.
진실은 어느 한편에만 유효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동국사 가는 길에 창작, 전시 공간인 여인숙(與隣熟)이 있다.
실제 여인숙(旅人宿)이었던 곳을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것이다.
새로운 이름은 '여럿 이웃이 모여 뜻을 이룬다'는 듯을 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만남"이란 제목의 전시회를 돌아보았다.
군산에는 게스트하우스도 일본식이 있다. 유명한 게스트하우스 고우당(古友堂)은
'옛 친구의 집'이란 한자 뜻에 '고우당께'(곱다)라는 전라도 사투리를 표현한 이름이다.
역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집을 복원한 것이다.
신흥동에 있는 일본식 가옥은 군산에 남아 있는 개인 주택 중 가장 번듯한 외모를 지녔다.
히로쓰라는 일본인 지주의 집이라고 하여 히로쓰가옥이라고도 한다.
영화 "타짜"에서 '지리산 작두, 고니'(조승우)가 '평경장'(백윤식)에게 타짜의 기술을 배우던 곳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군산의 도로는 서울에 비해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큰길에서 살짝 벗어나이면 뒷길로 들어가면 서울과는 달리
오고가는 차도 거의 없고 주차 공간도 비어 있는 곳이 많아 넉넉하고 여유로웠다.
길 한 가운데 서서 기지개를 크게 켜고 싶을 정도였다.
서울에선 차를 운전하거나 세우는 것에도 종종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던가.
문득 어떤 사물이나 장소에는 거기에 알맞는 '인간적인'(?) 크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크기의 임계치를 벗어나면 서울처럼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는 또 다른 무엇이 되는 마지막 크기 말이다.
군산의 길을 걸으며 멀지않아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귀농이 아닌 중소도시로)
반드시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아내와 다짐해 보기도 했다.
부디 꿈이 이루어지기를.
골목길을 자주 만나는 것도 군산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서울에서 사라지는 것 중의 하나가 골목길이다.
금 간 브로크의 키 낮은 담
삐뚤빼뚤한 보도블록 곁으로
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거리고
귀가하던 늙은 내외가 구멍가게 바랜 파라솔 아래 앉아삶은 달걀과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는 곳.
우편함 위에는 포장이사 열쇠수리 딱지들 옹기종기 붙어있고
반쯤 열린 철대문 안쪽으로문간방 새댁네의 부엌세간들이 비치는 곳이기도 하는 곳 얌전한 곳.
직장 없는 안집 둘째가 한번씩 청바지에 손을 꽂고 골목 이쪽저쪽 훓어보다가 침을 뱉고 다시 들어가는 곳.
대문 돌쩌귀엔 솔이끼도 몇 돋아 있는 곳.
스티로폼 상자에 파와 고추 두그루씩과 상추 몇 포기가 같이 사는 곳.
떨어진 자전거 바퀴 하나가 몇 년째 모셔져 있는 곳.
몽당비가 잘 세워져 있는 곳.
이 하찮은 곳을 좀
부디 하찮은 대로 좀.
-김사인의 시, 「이대로 좀」
초원사진관은 1998년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온 곳이다.
원래 차고였던 곳에 촬영을 위한 영화 세트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진관의 기능은 없고 영화 관련 기념 현장일 뿐이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잔잔한 사랑과 죽음의 영화.
여행에서 돌아와 아내와 영화를 다시 보았다.
한석규는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배우이다.
물론 심은하도 좋아한다.
내친 김에 심은하가 주연한 또다른 상큼한 사랑의 영화 "미술관옆 동물원"도 연이어 보았다.
월명공원 아래로 똟린 굴을 지나니 바다가 보였다.
굴의 이름은 해망굴이다. 아마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인가 보다.
일제강점기에는 통행이 빈번한 곳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차량이 통행이 금지되어 도보통행만 가능하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북한군 지휘본부가 터널 안에 자리 잡아
연합군 공군기의 공습 목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수산물센터에서 아내는 말린 박대를 몇 마리 샀다.
택배도 되어 부치고 나니 새삼 편리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산물센터를 나와 해안길을 따라 걸었다. 금강 하류를 가로 질러 건설 중인 군장대교가 보였다.
내년에 완공 예정이라고 한다. 군산과 장항을 연결한다는 뜻이겠다.
우리는 다리를 지나 근대역사문화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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