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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2 -구례, 늦가을2

by 장돌뱅이. 2014. 12. 28.

구례의 숙소는 쌍산재라는 한옥집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방문 창살이 선명하게 비친 하얀 창호지가 눈이 부셨다.
한옥이라 방바닥은 따뜻했으나 방안의 공기에서는 찬 기운이 느껴졌다.
잠에서 깨어서도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까지 덮고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일어났다.

방에 딸린 간이 부엌에서 물을 끓여 작은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봉지 커피로 입가심까지 마치고 방문을 여니 이런! 뜻밖에 비가 추적이고 있었다.
아침에 섬진강변을 걸어볼 예정이었는데 낭패스러웠다.
쌍산재 주인에게서 우산을 빌리고 구례읍까지 나가는 택시를 부탁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일정을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야 했다.

우리를 데리러 온 택시 기사는 "좌충우돌 구례택시이야기(http://blog.naver.com/sswlim)" 라는
블로그을 운영하는 "윤서아빠 임세웅"이라는 분이었다. 윤서아빠는 운전을 하면서도
전남관광해설사 교육을 이수했고 또 숲길체험지도사 전문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쌍산재 주인이 "아주 특별한 택시운전사"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구례까지 나가는 동안 윤서아빠에게서 구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가 개이면 천은사에 갈 것이라고 하자 그분은 천은사를 보고 난 뒤 천은사를 감싸고 도는
숲길을 걸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이 날 오후 우리는 그대로 했다.
섬진강변도 우리가 생각했던 곳과 다른 곳을 알려주었다. 뒷날 역시 이곳도 그대로 했다.
윤서아빠가 겸손한 태도로 알려주는 정보는 과장이 없고 진솔했다.

대도시나 먼 나라 낯선 곳에서 삶을 개척하는 사람도 세상엔 필요하겠지만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애정과 자부심으로 고향을 알리는 일에
열정적인 윤서아빠 같은 분도 소중해 보였다.

예정에 없다가 비 때문에 가보게 된 야생화압화전시관은 아내와 내겐 크게 흥미로운 곳은 아니었다.
전시관에 가기 전 우리는 지리산 일대의 야생화를 건조하고 눌러서(압화) 전시회 놓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압화는 야생화의 꽃과 잎, 줄기 등을 말리고 누르고 약품처리를 하여 이를 소재로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위 사진은 전시된 그림 중에 "조각보에 수 놓다"란 제목의 작품이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동안 비가 그쳤다.
천은사 이외에는 특별히 생각한 일정이 없으므로 우리는 구례읍 버스터미널까지 천천히 걸었다.
좁은 읍내 도로는 오고가는 차와 양옆에 주차한 차들로 번잡했다. 이제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해법은 도로를 넓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줄이는데 있다고 아내에게 이야기
했지만 말하는 나 스스로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 느껴지진 않았다.

아침에 구례에는 비가 내렸지만 산위에는 눈이 내렸던가 보다.
멀리 보이는 노고단은 하얀 고깔을 쓰고 있었다.
어제 들렸던 동아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터미널에서 노고단행 버스를 탔다.
우리는 천은사 앞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기사아저씨가 노고단의 눈구경을 안 하느냐,
천은사는 나중에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러도 되지 않느냐고 제안을 했다.

성삼재 버스는 겨울엔 운행을 하지 않으므로 버스를 이용해서 편하게 노고단의 눈구경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강조했다. 나는 망설였다. 굉장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갈등 끝에 우리는 예정대로 천은사 정거장에서 내렸다. 노고단을 보고온다고 해도
시간적으로 큰 무리는 아니었지만 천은사에서 한가로움을 더 오래 즐기기로 한 것이다.

천은사 일주문의 현판의 글씨는 구불구불하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천은사는 822년 감로사(感露寺 또는 甘露寺 )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불탄 뒤 중건을 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절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泉隱寺)로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꾼 뒤 원인모를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시대 명필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이곳에 수기(水氣)를 불어놓기 위해
'지리산 천은사'라고 마치 물흐르는 듯한 글씨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사실이냐 아니냐,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에 주목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에 의미있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가치 체계를 생각해보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 재앙이 되어 돌아오는 사례들을
우리는 숱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런 과학이 '비과학'보다 우수하고 합리적이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미신보다 무서운 것은 맹신이다.

우리는 천은사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고 옆쪽으로 난 문을 통해 절밖으로 나갔다.
아침에 윤서아빠가 가르쳐준 천은사 둘레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길은 절을 감싸고 돌았다.
계곡의 물소리는 맑았고 단풍은 지천이었다. 비를 뿌렸던 구름이 걷히면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숲속엔 마른 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가끔씩 불었다. 우리는 그 길을 알려준 윤서아빠에게 감사했다.

천은사 둘레길은 30분 정도 걸리는 평이한 길이었다. 우리는 다시 천은사 경내로 돌아왔다.
극락보전과 보제루 사이에 마당이 넓었다. 학교의 운동장 말고 흙마당을 본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주택문화가 아파트로 변하면서 마당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릴 적 마당은 골목과 더불어 개구장이들의
놀이터였다. 어른들에겐 타작을 하고 빨래는 널고 초상을 치루고 잔치를 벌이는 삶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툇마루에 기대고 앉아 아내와 말없이 텅 빈 채로 햇살만 가득한 천은사의 마당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천은사를 나와 아래쪽 광의면 월곡리에 있는 매천사로 향했다. 한시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길옆으로 펼쳐진 가을 들판을 보며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오고가는 차의 행렬이 유일한 방해물이었다.

매천사는 조선 말기의 우국지사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매천은 이곳 구례에서 태어났다. 28세 때 한양에 올라가 첫 시험에서 장원을 하였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밀렸다. 이를 알게 된 황현은 남아있는 시험을 내치고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33세에 다시 과거를 치렀으나 이것은 부친의 당부를
거역할 수 없어서였다고 한다. 이때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부정부패가 극심한 세태를 보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글을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한가로운 땅을 골라
   띠와 대나무로 집을 세우고서
   내 오두막을 사랑하여
   현판까지 걸었어라
   뜰을 질러가는 마을길도 막지 않고
   문을 열면 다 들어오도록 주산에 자리 잡았어라
   밥을 먹은 뒤에 형제들이 따라 나오고
   꽃밭 속에선 아이들이 장난치는 곳
   다람쥐와 새 말고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사립문이라고 만들긴 하였으나
   잠가 본 적이 없어라
                    - 매천의 시 -

1910년 나라가 강제로 일본에 병합되었다. 이에 매천은 유서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을 했다.
죽음으로 부정한 시대와 부패한 나라에 대한 항변을 한 것이다. 유서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씨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명분은 없다.
   다만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하지 마라."

절명시의 셋째 수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도 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하고 말았구나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그런데 아내와 나는 매천사와 인연이 없는가 보다.
언젠가 오래전의 여행에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매천사의 문은 잠겨 있었다.
이날 하루치의 만족감은 천은사 뒷길에서 채워졌으므로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고리가 걸린 문앞을 서성이다 매천사 앞 계단에 앉아서 윤서 아빠에게
우리를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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