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1 - 서울 약현성당

by 장돌뱅이. 2014. 12. 5.

발밤발밤
올해는 아내와 함께 생활한 이래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7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을 하였고 바로 뒤이어 딸아이의 결혼이 있었다.
그 두 가지의 큰 변화에 사이에 대대적인 집수리도 있었다. 이사와 결혼과 집수리는 형태는 다르지만 그 경위는 짐 싸기와 짐 풀기로 단순화할 수 있겠다. 정신적인 긴장에 육체적인 노동이 더해진 시간이었다. 수고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저기서 가을 단풍소식이 들려왔다. 아내와 나는 귀국 후 잠시 접어두었던 여행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에도 이와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한 인도네시아 주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첫 외국생활에서 돌아온 직후라 그런지 그때 나는 내 나라의 풍경과 내력에 대한 갈증이 깊었다. 서너 달 동안 매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당시 거주지인 울산 인근과 경주로 차를 몰았다. 그러고 나서 점차 반경을 넓혀 먼 곳으로 나아갔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국토는 외국처럼 크지 않았다. 주말과 연휴를 이용하면 웬만한 곳은 모두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그러나 갈 곳은 많았다. 지도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가며 오고 가는 길의 가능한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주마간산의 강행군이었다. 책을 읽는 방식에 비유하자면 속독(速讀)과 다독(多讀)과 남독(濫讀)을 섞어놓은 여행이었다. 한정된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월급쟁이로서 다른 선택이 없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납득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그런 여행 방식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달려간다고 세상 모든 곳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설혹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단순 양적 축적에 큰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 이어졌다. 필요한 것은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래 보는 '정독(精讀)'이었다.

인도네시아 주재기간 보다 훨씬 긴 미국생활을 마친 뒤인터라 지금은 국토에 대한 갈증의 강도가 다시 한번 최고조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아내와 나는 이전처럼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치지 않는다. 시간이 나는 대로 천천히 국토를 돌아볼 생각이다.

"발밤발밤"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천천히 지나가면서 혹은 자주 멈춰 서서,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물끄러미 그리고 오래 바라보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사람은 오래 보는 것을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젠 무엇을 위해서 건 서두를 나이는 지난 것도 같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의 '시즌2'를 시작하게 되었다.

서소문 천주교 성지
아내와 나는 미국에 주재하는 동안 셰례를 받아 천주교신자가 되었다.
천주교에는 주민등론등본 같은 교적이라는 서류가 있어 주거지를 옮기게 되면 새 주소지 가까이 있는 성당에 제출하여 '전입신고'를 하는 것이 상례인 모양이나 귀국 후 아내와 나는 무등록 신자로 당분간 서울의 여러 성당을 돌며 미사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그것이 신자로서 합당한 행동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교회 조직이 주는 부담감이나 종교적 진지함이 어색한 초보신자의 낯가림일 뿐이다.

약현성당은 아내와 함께 하는 '발밤발밤 여행'의 첫 방문지이다. 성당에 가기 전 먼저 서소문의 천주교 순교 성지에 들렸다.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1791년(정조 15년)의 신해박해에서 시작되어 신유박해 1801년(순조 원년), 기해박해 1839년(헌종 5), 병인박해 1866년(고종 3)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무려 1만 명이 넘는 천주교신자들이 사학(邪學)의 무리로 단죄되어 죽임을 당했다. 천주교에서 성인으로 모셔진 103분 중 44분과 올여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된 124분 중 27분이 이곳 서소문에서 처형되었다.

서소문 공원의 북쪽 끝에 1999년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이 있다. 3단의 둥근 기단 위에 세 개의 직사각형 모양의 탑이 서있는 형태이다. 탑에는 동그란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조선시대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것으로 박해를 상징한다고 한다. 각 탑의 구멍에서 아래쪽으로 7개의 선이 수직으로 파여 있다. 가운데 주탑에는 십자가 조각이 있고 좌우에 대칭으로 높이가 낮은 두 개의 탑에는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탑 아래 기단 위엔 생명을 상징하는 물이 흐르도록 해놓았다.

1783년 이승훈은 사신일행으로 북경에 가서 서양 신부 그라몽(GRAMMONT 染棟材)으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익혀 세례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신자가 된 것이다. 이승훈은 이듬해 귀국하여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벽과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이로써 1784년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공식적인 원년이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종교 이전의 학문, '천주학' 혹은 '서학'으로 이미 조선 사회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 조선 후기의 유교적 지배원리에 의한 사회계급적 모순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갖가지 폐단에 염증을 느낀 진보적 지식인들이 새로운 문명의 지도원리로써 '천주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조정이 발하는 토사문 (討邪文)에도 사교(邪敎)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학(邪學)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미 17세기 초에 허균이 북경을 다녀오면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을 가져왔고 병자호란 때 북경에 인질로 잡혀있던 소현세자 역시 귀국 시 천주교 관련 물품을 가져온 바 있다.

북학파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과학자였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영조 41년이었던 1765년 초겨울 사신으로 북경을 다녀오면서『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이란 여행기록을 남겼다. 그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첫 번째 구경처로 남천주당을 택했고 그곳에서 서양 선교사였던 유송령 劉松齡(독일인 Hollestain)을 만나 '천주학'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홍대용은 이미 '천주학'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던 듯 천주당 벽에 걸린 10여 명의 화상 가운데서 금세 『천주실의』를 지은 마태오리치(利瑪竇)의 화상을 가려낼 정도였다고 한다.

내(홍대용)가 말하기를 "천주학문이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에 병행한다 하는데, 우리는 동국 사람이어서 홀로 알지 못하니, 원컨대 그 대강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송령이 말하기를, "천주학문은 심히 기특하고 깊습니다. 그대는 어느 대목을 알고자 합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유도(儒道)는 인의(仁義)를 숭상하고, 노도(老道:도교)는 청정(淸淨)을 숭상하고 불도(佛道)는 공적(空寂)을 숭상하는데, 원컨대 천주의 숭상하는 바를 듣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유송령이 말하기를, "천주의 학문은 사람을 가르쳐 천주를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홍대용의『을병연행록』중에서 -

1779년 경에는 경기도 광주 천진암 등지에서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이벽 등의 당대 지식인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했다. 이들은 일반 학문만이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하였다. 따라서 이들과 친분이 있었던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고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전파가 제국주의의 확산과 함께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작전'의 결과라면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이처럼 우리 민족 스스로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수용이었다.
이는 천주교 전파 사상 유례가 없는 경우라고 한다.

천주교는 점차 일부 지식인의 학구적 영역을 넘어 새로운 우주원리와 가치관으로 사람들 속으로 파급되었다. 천주교에서는 군주도 천주의 아들이라고 가르쳤다. 남녀가 한 장소에서 어울려 예배를 보는 형식도 파격이었다. 정치적 소외층이나 정통적 신분 질서에 억눌려 있던 중인과 하층민, 여성들에게 신분과 나이, 성별, 학식의 구분이 없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란 가르침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자 구원의 복음이었을 것이다. 이런 천주교의 파급은 지배층에겐 오랜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국내외 정치 상황과 맞물리면서 비극적 탄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말이나 글로서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김훈의 표현)의 마지막이 던지는 역사적, 종교적 의미에 대해 판단하거나 천착할 만한 근거를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처절했을 것이라는, 그리고 단순한 처절만이 아니라 경이롭고 경건했을 것이라는 짐작에 몸을 떨 뿐이다.

정약종은 봄에 참수되었다.
(···) 정약종은 형륙을 맛있는 음식  먹듯 하므로 주리는 더 조여도 실토하지 않을 것이며, 심문 도중 죽어버려서 나라의 정법을 시행할 수 없게 되는 사태를 당상들은 우려했다. 약종의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서둘러 사형을 집행해야 국본이 바로 설 것이라며 대신들은 편전 마루에  이마를 찧었다. 정약종은 위관의 심문에 이끌리지 않았다. 정약종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스스로 진술했고, 그 이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매를 불렀고 다시 침묵으로 매에 답했다.

······정약종, 너의 사호는 무엇이냐
······아구스티노다. 사호가 아니라 세례명이다.
······해괴하구나. 네 아비가 지어준 본명을 버린 까닭이 무엇이냐.
······본명으로 돌아간 것이다. 새롭게 태어남이다.


······정약종, 너는 반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려서 『소학』을 배웠고 반듯한 인성을 갖추었을 터인데 어찌 그리 횡잡한 헛것에 들려 있는가. 너의 이른바 천주가 실재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있음을 네가 증명할 수 있느냐?

······증명할 수 있다. 쉬운 일이다. 어린아이가 웃으면서 걸어올 때, 나는 천주의 실재함을 안다. 그대들이 국법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가두고 때릴 때 저들의 비명과 신음이 천주를 증명한다. 그대들의 악행을 미워하고 또 가없이 여기는 내 마음을 통해서 천주는 당신을 스스로 증명하신다.

 (···) 정약종은 칼을 받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형리가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치였다.
······주여 오소서.
정약종은 하늘을 우러르며 웃으면서 칼을 받았다. 도성 쪽으로 날이 저물었고 서강 쪽 하늘에 노을이 번져 있었다. 그의 웃음은 평화로웠고 큰 상을 받는 자의 기쁨으로 피어나 있었다. 칼 쥔 망나니는 그 웃음이 무서워서 칼자루를 더듬었다. 망나니는 연거푸 술을 마시고 칼춤을 추며 빙빙 돌았다. 망나니는 한칼에 정약종의 목을 끊어내지 못했다. 망나니는 반쯤 잘린 약종의 목에 다시 칼질을 했다. 정약족의 머리는 두 번 칼질에 떨어져 나갔다. 잘린 얼굴이 평안했다.

-김훈의 소설, 『흑산(黑山)』중에서 -

생전에 정약종은 『주교요지(主敎要旨)』저술했다. 천주교의 교리를 부녀자들이나 일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풀어쓴 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천주교 파급에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정약종을 꼽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미국에서 세례를 받을 때 나는 "정약종아구스티노"란 세례명을 받았다. 정약종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 대한 존경의 뜻도 포함한다는 생각으로 받았으나 아무래도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큰 이름을 너무 쉽게 받은 것 같다.

최근 정부와 지자체가 추진하는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사업의 내용이 천주교에 너무 치우친 것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지 않으리라 믿지만 만약 세간의 우려가 사실이라면 사업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서소문은 원래 새남터와 더불어 조선시대 '죄인'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던 처형지였다.
천주교도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사형이 이곳에서 집행되었다. 올해로 120주년이 되는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도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홍경래도 그렇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숱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추모의 공간을 의도했다면 그들 모두를, 적어도 역사적 발자취가 뚜렷한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서소문이 천주교의 성지인 것은 맞지만 천주교만의 현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룩한 순교가 있었다고 해도 종교 밖에선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약현성당






서소문공원에서 가까운 중림동의 야트막한 언덕에 약현(藥峴)성당이 있다.
1893년 프랑스 신부에 의해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명동성당보다 6년 먼저 지어졌다고 한다. 대규모 박해를 거친 천주교는 1886년에 이르러 마침내 선교활동을 보장받게 되었다. 약현성당은 그 가시적 성과이자 상징적 의미가 배인 곳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져 견고하고 다부진 인상을 주는 약현성당은 정면 중앙의 종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외에는 눈에 띄는 장식이 없어 단순하고 아담하다. 원래 내부에는 남녀 구분을 위한 칸막이가 있었으나 1921년에 철거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1998년 2월 화재로 본당 내부가 소실된 후 복원 된 것이다.

종교 활동이 보장된 이후 천주교는 급속하게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구한말을 지나 1910년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 시점에 전국에는 조선교구 1개, 주교 1명,외국인 신부 46명, 한국인 신부 15명, 한국인 수녀 59명, 신도73,517명, 69개의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교세 확장은 계속된 듯하다. 1945년에는 전국에 8개 교구, 7명의 주교, 한국인 신부 132명, 외국인 신부 100여 명, 신자18만여 명, 성당160개소가 되었다.

역사상 가장 참담한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비약적인 교세 확장의 통계치가 눈길을 끈다.
박해 뒤에 찾아온 믿음과 선교의 화려한 결실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의 천주교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천주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총독부와의 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없진 않았으나 , 이 문제도 1932년 교리문답의 수정과 1936년 교황청 포교성의 지시에 순응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의 독려에 따라 8월 15일 종현천주교청년회에서 "황군에 대한 무운장구 및 국위선양 기도회"를 열고 고문신부로서 노기남 신부가 참여하여 시국강연을 했다. 이후부터 각종 시국행사에 동원되다가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하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맹했다. 1937년 7월부터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친일행위는 시국 관련 기원미사 9622회, 시국 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 23전, 위문금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와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윗글에서 보듯 우리 민족의 고통이나 독립보다는 교회조직의 유지와 확장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해 일제 권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프랑스 외방전교회 파견 신부들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지도층의 의도적인 '노력'도 교세 확장의 큰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한 예로 대한의용군의 신분으로 '일제와 전쟁 수행의 한 과정'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음을 주장한 안중근(토마스)에 대해 당시 뮈텔(MUTEL) 주교는 그런 흉악한 살인자가 천주교 신자 일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또 안중근을 면회한 빌렘 신부는 일본제국에 대한 오해를 거두고 성도로서 사람을 죽인 것을 참회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천주교는 나아가서 "천황폐하의 어전 앞에 예함도 이단이 아닌 국민 된 자가 가히 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신사참배까지 용인하고 말았다. 일제는 종교를 이용하여 신자들의 비판의식과 저항의식을 약화시키고 이를 통해 종교는 조직의 이익을 보장받는'기브 앤 테이크'였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천주교 인사는 7명이다. 약현성당의 5대 주임신부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왕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을 주저 없이 뿌리친 예수의 단호함과는 비교되는 모습들이 아닐 수 없다. 단호함은커녕 시대를 절망하는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라도 불렀다면
······ 

불행했던 시기에 그것이 천주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변명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가슴을 두드리는 '내 탓이오'의 회개는 개개인의 윤리적 점검과정만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지난 8월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종은 "조직의 안위에만 치중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교회가 좀 더 깨지고 상처 입고 더러워지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약현성당 부근

약현성당 부근에 있는 식당 중림집에서 동태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시원시원하고 아기자기한 주인아주머니의 성품이 음식 속에도 녹아있는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마을 골목길을 지나 손기정공원과 기념관까지 걸었다.

손기정공원을 나와 성당 가까운 커피숖으로 들어갔다.
미국을 다녀오는 사이 부쩍 늘어난 것 중의 하나가 커피전문점이다. 스타벅스와 커피빈 이외에도 파스쿠찌, 할리스, 탐앤탐스 등등 여러 커피전문점이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띈다. 커피전문점은 예전의 다방처럼 누구를 만나거나 커피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혼자서도 와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장소도 되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에도 젊은 학생 두엇이 컴퓨터와 책을 열어놓고 진지한 자세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도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다. 약현성당의 토요 저녁 미사까진 두어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가끔씩 눈을 들어 창밖으로 기우는 늦가을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여행과 사진 >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밤발밤2 -구례, 늦가을2  (0) 2014.12.28
발밤발밤2 - 구례, 늦가을1  (0) 2014.12.27
양재천변 가을 단풍  (0) 2014.11.04
간송미술관 가을 전시  (0) 2014.10.19
축구 코스타리카 평가전  (0) 2014.10.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