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와 상관없이 기차여행은 내게 여행의 원형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 버스나 전차를 타고 청량리나 동대문 쯤의 시내를 나가는 것이 특별한 나들이였다면
고속버스라는 것이 등장하기 전까지 기차는 그보다 먼, 잠을 자고 와야 하는 장거리 여행을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엔 순전한 여행이라기보다는 집안의 대소사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어른들을 따라가는 정도였지만.
기차에 올라 출발를 기다릴 때의 조바심에서부터 덜컹이며 다리를 건너거나
깜깜한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의 흥분은 지금의 그 어떤 놀이기구에서도
느낄 수 없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아내가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을 제안했다.
국내여행도 오래간만이지만 기차여행은 더 오래간만이었다.
부산이나 대구를 꼽아보다가 전라남도 구례를 택했다. 지리산과 섬진강 때문이었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거나 산 사이로 강이 흐르거나 아무튼 산과 강이 있는 우리나라의
흔한 풍경을 이국생활 동안 아내와 자주 그리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례의 입구에 위치하였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구례구(求禮口驛) 역은 구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정구역상으로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다. 역앞을 흐르는 섬진강을 다리로 건너가면 거기서부터
구례가 시작된다.
다리 입구에서 구례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승객이 몇 사람 되지 않아 차안은 한산했다.
우리와 같이 기차에서 내린 여행객 차림의 부부와 스님 한 분, 구례 할머니 몇분이 전부였다.
구례 터미널까지는 10여 분 거리였다.
구례는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고장이라고들 한다.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산중 들'치고는 넓은 들이 큰 것 세 가지이고
강과 산이 어울린 자연 경관과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어 생긴 풍요로움,
그리고 지역민들의 순박하고 후한 인정이 아름다운 세 가지이다.
여섯가지를 요약을 하자면 결국 지리산과 섬진강이 되겠다.
구례의 첫 방문지는 식사를 해결하러 간 동아식당(061-782-5474)이었다.
구례토박이이신 주인장 할머니의 정성과 손맛이 느껴지는 정겨운 식당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그러나 서울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가오리찜을 맛볼 수 있었다.
말랑말랑하게 찐 가오리의 부드러운 살을 데친 부추와 함께 양념장이나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 맛에 자꾸 막걸리 잔을 뒤집어야 했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대전의 큰누님은 지금도 내가 간다고 미리 알려놓으면 무엇보다
먼저 꾸덕꾸덕하게 가오리를 말려놓는다. 주인 할머니의 가오리찜 맛이 큰누나를 떠올리게 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생두부나 김치, 콩나물무침도 좋았다. 계란후라이가 나오는 것도 특이했다.
동아식당은 이번 여행 중에 가장 인상적인 식당이었다. 여행 중 우리는 두 번이나 더 갔다.
돼지고기를 넉넉히 썰어넣은 김치찌게 맛도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화엄사(華嚴寺)로 향했다.
주차장과 주변의 번잡한 시설지구를 지나 화엄사 계곡을 오르자 끝물의 단풍이 자못 화려하게 이어졌다.
지금은 지리산 종주의 시발점을 흔히 성삼재로 잡지만 30년 전 처음으로 지리산을 종주할 때
나는 화엄사계곡을 타고 올랐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라 하여 코재라고 불렀던 급경사를 지나
눈썹바위에서 일행과 거친 숨을 고르며 땀을 식히던 야간산행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화엄사에 들어설 때마다 시야를 압도해 오는 건물은 각황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지리산의 기품과 위엄을 압축해 놓은 듯한
이 웅장한 건물은 경내를 돌아보는 내내 엄숙함과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들곤 했다.
이번에 각황전은 수리 중이었다. 작업 보조대에 둘러쌓여 본래의 정연함을 잃고 다소 어수선하게 보였다.
그러나 각황전을 등지고 내려다 보는 화엄사의 모습만으로도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나 대립하지 않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화엄의 근본 도량다운
묵직함과 고즈넉함은 충분해 보였다.
화엄사에서 내려와 구례장터를 돌아보았다.
오늘이 마침 5일장 장날이라는 것을 구례에 내려와 어디선가 귀동냥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구례장은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크고 활기도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저녁이라 파장 무렵인데도
여전히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방구통통 구례장 구린내 나서 못 보고,
아이고 데고 곡성(谷城)장 시끄러워서 못 보고,
뺑뺑 돌아라 돌실(石谷)장 어지럼병 나서 못 본다
장돌림들이 부르던 익살스런 옛 노래지만 승용차가 없어서 뭔가를 못 사는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
사람들과 가게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만 했다.
저녁식사는 구례읍 부부식당에서 다슬기탕으로 했다.
가난했던 시절 여름철 무더위를 이기는 보양식으로 먹었다는 다슬기탕, 이제는 철을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슬기는 표준어로 전라도에서 대사리로 부른다. 충청도에서는 올갱이로, 강원도에선 꼴부리,
경상도에선 사고둥, 고둥 혹은 고디로 부른다. 이름만큼 지역마다 식당마다 조리법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전라도에선 된장을 쓰지 않고 국을 끓여낸다. 대체로 충청도에선 된장을 풀고 대구에서는 들깨가루를
갈아 넣기도 한단다.
다슬기를 끓이면 댓잎처럼 푸른빛의 국물이 우러난다. 다슬기 피에 푸른 색소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슬기 살의 육질은 쫄깃하고 맛은 쌉쌀하다. 입안이 개운해진다. 뱃속을 편안하게 해주어 술꾼들의
해장용으로도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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