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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2 -구례, 늦가을(끝)

by 장돌뱅이. 2014. 12. 28.

아침에 일어나 숙소인 쌍산재를 산책했다. 쌍산재는 관리동 포함 7채가 들어선 한옥집이다.
현 운영자의 고조부 되시는 분의 호(쌍산)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문에 들어서면 비탈이라 오밀조밀한 느낌이 들지만 계단길을 통해 대숲을 지나면 평지가 넉넉하게 펼쳐진다.
한옥이다 보니 아파트와 같은 완벽한 보온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겨울철의 약점을 제외하곤 묵어갈만 한 곳이었다.

쌍산재 대문 바로 옆에 "전국 최상의 물"이 나온다는 당물샘이 있다.
혹독한 가뭄이나 장마에도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당물샘의 물은
한 달 넘게 독에 담아 두어도 물때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때 당물샘이 있는 상사 마을은 전국에서도 손 꼽히는 장수 마을이었다.
70객은 장년이고 환갑노인은 청년 취급을 받으며 90살이 넘은 할머니가 바늘귀를 꿴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무병장수의 가장 큰 요인으로 당물샘을 들었다. 이미 옛날부터 당물샘의 효험은 주위에 널리 알려진 듯
전염병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었을 때 다른 마을 사람들이 '안 죽는 물'을 찾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지리산이 만들어 낸 생명의 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곳 마을 사람들의 장수요인에는 당물샘 이외에 몇 가지 생활 특성이 있다고 한다.
채식 위주에 싱겁게, 적게 먹으며, 부부 관계가 원만하고 일손을 놓지 않으며, 하루 6-9시간씩
깊은 잠을 자고, 슬픔과 괴로움을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낙천적 인생관 등이 그것이다.

아내는 춥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샘물 몇 모금을 마셔보았다.
아무 맛도 없는 맛 - 물은 원래 무색무취의 맛이어야 최고 아니던가.

쌍산재의 상사마을에서 하사마을을 지나 운조루까지는 걸어서 한 1시간 정도가 걸렸다.
길 왼쪽으로는 지리산 자락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섬진강 사이로 넓은 들이 펼쳐졌다.
큰 산과 큰 강이 만나면서 빚어놓은 '구만들'이다. 구례의 세 가지 큰 것 중의 하나가
'산중 들'치고는 넓은 들이라고 했다. 그 말에 어울리게 추수가 끝나 더욱 넓게 보이는
텅 빈 들판이 험준한 산맥 속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거대하고 위압적인 미국의 자연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정겨운 풍경이었다.

"그래 맞아 . 바로 이 풍경이야!"

아내와 나는 오래 맛 보지 못했던 고향음식을 대한 귀향객처럼 발걸음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따뜻한 정감과 향긋한 흙냄새가 가슴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

늦가을의 구례에는 감이 흔했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 감나무와 감이 보였다.
집울타리 안 마당 한쪽에도 있고 아예 과수원으로 감을 재배한 곳도 있었다.
감이 빠진 가을의 풍경을 상상하기 힘들다. 집안에 심은 과일나무로 감나무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다.
빨갛게 익은 감나무가 있는 집은 따뜻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감나무에는 오절(五節)이 있다고 한다.
몇백 년을 살고(壽), 새가 깃들지 않으며(無鳥巢), 벌레가 꾀지 않고(無蟲),
목질이 단단하고(木堅), 열매가 달길 그보다 더한 것이 없다(嘉實)는 것이 감나무의 오절이다.
이 중에 감나무와 살아보지 않은 내가 아는 것은 감의 맛뿐이다.
구례에서 만난 한 사람은 구례에서는 감에도 '개미'가 있다고 했다.
'개미'가 전라도의 음식 맛을 표현하는 사투리라는 것은 알고있지만
그 정확한 뜻을 몰라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그런데 개미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그렁께......그것이......서울양반이 알아듣긴 힘든 말인디......긍께 뭐랄까.....
기냥 '한 가지 맛이 더 있다' 이리 알아두면 쓰것 습니다."

나중에 인터넷과 책을 뒤져보니 보통 음식맛과는 다른 남도 음식의 특별한 맛 혹은 맛에 깊이가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서로 비슷한 어떤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 같다. 파헤칠수록 쓰임새가
많아 복잡해지는 전라도 방언 '거시기'처럼 '개미'도 그냥 '개미'로 알아두는 게 좋겠다.

그런데 올해는 구례만이 아니라 전국에 감 풍년이라 값이 '똥값'이 되어 감농사를 지은
농민들이 울상이라고 한다. 정작 도시인들에게는 그 헐값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1930년대 불황기에 미국의 탄광지대에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게 된다.

"왜 불을 때지 않아요? 이렇게 추운데."
"아버지가 실직을 해서 석탄을 살 돈이 없단다."
"그럼 왜 아빠는 실직을 했어? 엄마."
"석탄을 많이 캐서 남아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야."

아침 산책의 반환점인 운조루(雲鳥樓)는 토지면 오미리에 있다.
토지면의 토지(土旨)는 원래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뜻의 토지(吐指)였다고 한다.
옛날 여인들에게 가락지는 소중한 정표로서 성행위를 하거나 출산을 할 때만 빼는 것이었다.
즉 생산을 뜻한다. 이 이름난 양반가옥은 풍수지리적으로 금환낙지(金環落地) - 지리산의
선녀가 섬진강으로 목욕을 내려왔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땅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풍요와 부귀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인 것이다.

1776년에 유이주라는 사람이 이곳에 운조루를 지었다.
천여 평의 대지에 건평이 백평이 넘는 이 거대한 집을 지었으니 당시의 부귀영화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길지(吉地)도 흥망성쇄의 진리는 피할 수 없었던지 90년대 후반 이곳을 다녀갈 때는 매우 쇄락한
상태였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이번에는 멀리서도 말끔히 단장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 단장된 집을 느긋히 돌아보지 못했다.
운조루 입구에 있는 버스정거장에 서 있던 아낙이 10분쯤 뒤면 구례읍으로 나가는
버스가 온다고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버스는 1시간 반이나 지나야 있다고 해서
단거리 선수처럼 집을 돌아보고 나와서 버스정거장에 서서 24칸에 달한다는 긴 행랑채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버스를 타고 구례읍으로 돌아와 다시 택시를 타고 죽연마을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에 맞추어야 했기에 버스를 기다릴 수 없었다. 죽연마을은 사성암(四聖庵)으로
오르는 셔틀버스 정거장이 있는 곳이다. 사성암은 원효, 의상, 도선, 진각 등 네 명의 고승이 수도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확실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근래에는 그런 내력보다 텔레비젼 연속극 "추노"의
촬영지로 더 알려진 것 같다.

셔틀버스 정거장에는 수많은 관광버스와 사람들, 음식점과 감을 파는 장사꾼들로 장터를 방불케 했다.
우리의 목표는 사성암이 아니라 이곳에서 섬진강을 따라 구례구역까지 걷는 것이었다.
이 길은 하루 전 윤서아빠가 알려준 길이었다. 길을 걷는 내내 아내와 난 그분에게 감사를 했다.
봄이면 줄지어 서 있는 벚꽃나무에서 꽃잎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길이었겠지만
헐벗은 나무들이 서 있는 늦가을의 풍경도 상큼했다. 역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찻길에 차도 거의 없어서 우리는 우리만의 호젓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봄이 오면 아내와 다시 이 길을 걷자고 다짐과 약속을 했다.

길과 함께 이어진 섬진강은 유장하고 차분했다.
자연과 풍경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는다.
아내와 나의 기억 속에 섬진강을 읊은 시로는 김용택의 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없다.

   세상/우리 사는 일이/저물 일 하나 없이/팍팍할 때/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팍팍한 마음 한 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풀어 보낼 일이다./버릴 것 다 버리고/버릴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눈빛 하나로/어둑거리는 강물에/가물가물 살아나/밤 깊어질수록/
   그리움만 남아 빛나는/별들 같이 눈떠 있고,/짜내도 짜내도/기름기 하나 없는/
   짧은 심지 하나/ 강 깊은 데 박고/날릴 불티 하나 없이/새벽같이 버티는/
   마을 등불 몇 등같이/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새벽 강물에/눈곱을 닦으며,/
   우리 이렇게/그리운 눈동자로 살아/이 땅에 빚진/착한 목숨 하나로/우리 서 있을 일이다.
                                                                       -김용택의 시, "섬진강5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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