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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45 - 이선관의「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by 장돌뱅이. 2016. 4. 2.

"깡꿍"은 얼마 전 태어난 외손자 녀석의 태명이다.
딸아이 부부가 발리 여행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깡꿍(KANGKUNG)은 인도네시아 말로 태국에서 부르는 "팍붕"과 같은 채소다.
(우리나라에 없는 채소지만 굳이 해석한다면 '물시금치' 정도?) 

병원에서 태어난 깡꿍이가 산후조리원을 거쳐 드디어 우리집으로 왔다.
오는 즉시 녀석은 집안의 모든 분위기를 단숨에 장악하고
자신의 '안락'을 최우선해야 하며 최고로 중요하다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세웠다.

녀석이 지시를 내리는 방식은 한가지, 울음이다.

배가 고파도 울고
오줌을 싸도 울고
똥을 싸도 운다.
(대변은 세상의 모든 '깡꿍님'을 모욕하는 단어가 아닐까?
반드시 똥이라고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습도가 높아도 울고 낮아도 울고
더워도 울고 추워도 운다.
잠에서 깨도 울고
졸음이 와도 투정을 부린다.

녀석은 오만하게도 어떠한 경우에도 힌트를 주지 않는다.
온 가족이 그 이유를 찾아서 해결해 주어야 한다.

제일 어려운 건 이유 없이 울 때이다.
아니 우리가 미쳐 '깡꿍님'의 불편함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맹렬하게 쏟아내는 줄기찬 울음은 아내와 딸을 혼비백산하게 만든다.
이럴 때의 울음은 녀석이 내리는 가장 중한 명령임과 동시에

자신의 편안함에 태만했다고 진노하며 내리는 벌이다.

그럴 때면 상황파악이 안 되고 별 도움을 줄 것도 없는 나는
공연히 안절부절의 폼으로
뭔가를 하는 것처럼
부엌과 목욕탕을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라도 예의를 표해야 한다.

녀석이 잠이라도 들면 혹시 깰까
온 식구들이 무성음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주의력이 부족한 나는 무심코 보통 때와 같은 데시벨의 유성음으로 말을 내뱉다가
아내와 딸아이의 눈총을 받곤 한다.

밤에도 일정(혹은 불일정) 간격으로 먹고 자고 오줌과 똥을 싸기를 반복한다.

자신의 '시종'들에게 최소한도의 수면시간과 식사시간도 보장해주지 않을 때가 비일비재다.
해서 아침이면 아내와 딸의 얼굴은 자주 피곤으로 가득하다.
그래도 녀석의 일방통행, 안하무인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지는 않는다.
불만은커녕 늘 '성은에 감읍한' 자세로 아첨 떨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젖을 먹어도 장하다 하고 트림을 해도 방귀를 뀌어도 잘했다고 추임새를 넣는다.
심지어 똥냄새를 돌려가며 맡아보다간 킬킬거리기까지 한다.
똥의 횟수와 양, 그리고 색깔을 놓고 심각하게 토론을 벌일 때도 있다.
할아버지인 내게도 똥을 확인하고 냄새를 맡아보라고 강권도 한다.

엄마가 된 딸아이의 변모는 놀랍고 신기하기까지 하다.
녀석의 불만을 가장 잘 파악하고 가장 빠른 시간에 적절한 조치를 내리는 사람은 엄마가 된 딸아이다.
녀석이 가장 편안해하는 모습은 딸아이의 품에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을 때이다.
녀석은 딸아이가 불러주는 동요 메들리를 무척 좋아하는(?) 듯  눈을 뜬 채 잠잠하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주 불러주었다고 한다.
역시 엄마는 엄마다.
아내도 '깡꿍님'는 받드는데 있어선 딸아이의 보조일 뿐이다.
나는 그저 쓰레기 분리 수거나 자주 해주고 청소나 거들어줄 뿐이다.

가끔씩 앙증맞게 오므린 녀석의 작은 손에 검지손가락을 가만히 넣어본다.
그럴 때면 녀석도 나의 손가락을 가만히 잡아준다.
그 가녀리면서도 살가운 압박. 
손가락에서 시작된 무한한 희열이 아득하게 온몸에 전해진다.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가령
   손녀가 할아버지 등을 긁어 준다든지
   갓난애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든지
   할머니가 손자 엉덩이를 툭툭 친다든지
   지어미가 지아비의 발을 씻어 준다든지
   사랑하는 연인끼리 입맞춤을 한다든지
   이쪽 사람과 윗쪽 사람이
   악수를 오래도록 한다든지
   아니
   영원히 언제까지나 한다든지, 어찌됐든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참 좋은 일이다.

↑ 깡꿍이가 한가지 제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맨 아래 사진처럼 꽁꽁 싸매어 팔이 구속된 상태로 지낸다.
영아들은 그렇게 해야한단다. 물론 녀석은 용을 쓰며 틈만 나면 팔을 빼내려한다.

↑ 산후조리원에서 유리창 너머로 만난 깡꿍이

↑ 우리집의 실세가 된 깡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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